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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나는 놀기위해 태어났다.

by 오직~ 2006. 1. 15.
  후지어 패스를 넘고 나서 오랫동안 나를 물고 늘어지던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왜 로키 산맥은 나를 그토록 끌어당겼는가. 왜 나는 자전거로 미국을 건너고 있는가. 내 스스로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듣는 질문이다. 할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달리고 있지?

 질문을 받기가 부담스럽다. 그래도 피할 수가 없다. 미국을 횡단하려 한다는 시도에서부터 특이하게 작은 몰튼 자전거를 몰고 다닌다는 점 무엇보다 라이더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동양인의 외모 때문에 가는 곳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침 시골 카페에 들어서면 일제히 식사를 멈추고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죄송합니다. 문을 닫고 도로 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한다. 눈에 힘을 줘서 사열하는 장군의 눈빛으로 식당 안을 둘러본다. 눈을 마주치기 직전 시선들이 우르르 식탁으로 떨어진다. 식사 도중 안 보는 것처럼 하면서 지켜보는 기색을 느낀다. ‘저 시커멓게 생긴 동양녀석이 왜 우리 동네에 굴러들어왔어?’ 또는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해 죽겠는데 말을 걸 핑계가 없네’ 하는 표정들이다. 한국전에 참전했거나 한국주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항상 먼저 다가온다. “어디서 왔어?” “미주리 주.” “아니, 원래 말이야.” “한국.” “한국 어디?” “서울.” “그래? 나, 67년부터 68년까지 동두천에 있었어.” “아, 그래? 한국에 온 게 너의 첫 해외여행이었지?” 그렇게 말문이 트이면 다른 사람들이 합세해서 호기심을 실컷 충족시킨다.

 

“왜 횡단하냐” 숱한 호기심

  그 때 받는 숱한 질문들 중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게 바로 왜 자전거로 횡단하느냐는 것이다. 효율성과 생산성 그리고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시간 낭비거나 미친 짓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답하기가 까다로운 게 아니다. 나도 왜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자전거 혁명을 일으키자. 취지는 좋은데 진짜 좋아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는 중노동이다.

  그런데 그 말 속에 답이 있었다. 그냥 좋기 때문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는 로키 산맥을 넘기 위해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후지어 패스에 오르는 순간 절정의 감격 같은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강렬한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그냥 마음이 편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페달을 밟는 게 즐거워졌다. 페달을 밟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이 됐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또는 아프리카 문맹 퇴치기금 모금을 위해 횡단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자기가 좋아서, 페달을 밟는 데 몰입하는 게 좋아서 하는 것일 테다. 그렇지 않으면 주야장천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을 혹시 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맘을 정하기 앞서 이렇게 일주일을 보내보시길 권한다. 토요일 아침 한강에 나가 암사동에서 행주대교까지 36㎞를 한 번 왕복한다. 아마 대여섯 시간 걸릴 것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와서 밥을 맛있게 먹고 잠을 푹 자고 일요일 아침 일어나면 몸이 뻑적지근할 것이다. 교회 가자는 아내와 같이 축구하자는 아들의 청을 뿌리치고 자전거를 끌고 나간다. 이번에는 짐수레를 끌거나 짐수레가 없으면 배낭을 매고 자전거를 탄다. 배낭에는 이희승의 국어대사전과 같은 두꺼운 책을 네댓 권 집어넣는다. 이번에는 한강 고수부지에서 100㎞만 달려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고 느낄 것이다. 월요일 아침 출근 지하철을 타면 잠깐 눈을 붙인다고 생각했는데 오이도나 동막과 같은 낯선 곳에서 깨어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회사 갈 시간에 자전거를 끌고 나간다.

  한강은 지겨우니 이제 서울에서 대전까지 달려본다. 이번에는 배낭에 전날의 사전류에다 갈아입을 속옷을 챙겨 넣는다. 대전에 도착해 여관에서 자고 대충 끼니를 때운 뒤 화요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만약 그 날 집에 도착할 수 있다면 집에서 자고 수요일 아침 이번에는 춘천을 향해 출발한다. 배낭에 사전류를 들어내고 텐트와 슬리핑백, 코펠 등을 집어 넣어 실전상황을 방불케 하는 여행을 한다. 춘천 역 앞 광장에 도착해 한 귀퉁이에 텐트를 치고 잔다. 불안해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고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 역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금요일 하루는 집에서 푹 쉰다. 그리고 토요일 다시 한강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갈 때 이렇게 십수 번을 되풀이해야 미국을 횡단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냥 한강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런 일을 왜 하느냐고 물으니 말문이 막혔었다. 나는 이제 “재미를 위해서 (For fun)”라고 간결히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좋다. 그게 놀이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시켜서 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 뻣뻣하게 서 있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할 때 ‘국·영·수 해야지’ 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범생이도 아니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 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 (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와 같은 전체인구의 1%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 같은 일의 기계적 반복이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 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는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없이 일하고 쉼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엄청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년에 한 두 번 쓸까 말까 한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을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 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게,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 나가게 된다. 호모 파베르였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불렀던 것은 바로 세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의 미래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보다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종합되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 이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 잠시와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

 

20060113. 한겨레 홍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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