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깨달음의 자리

by 오직~ 2006. 3. 2.
남장사 혼해선사
▲ 경북 상주 노음산 남장사. 혼해가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당당한 모습으로 젊은 선승들에게 불성에 대한 의심의 불길을 지핀 곳이다.
세속서도 어김없는 ‘참’ 승려

6·25 전쟁 중이었다. 대찰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때였다. 경남 함양읍의 조그만 사찰엔 일흔이 넘은 노승이 피난 와 있었다. 이 절엔 전라도에서 피난온 20대 여인이 공양주(부엌살림을 맡은 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갑부의 딸로 해방 전 서울에서 여고를 나온 미모의 여인이었다. 좌익엘리트로 동경제대를 나와 소학교 교감을 하던 그의 남편이 전쟁 중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자 시어머니와 여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숨어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여인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자 노승은 법회 때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임을 이실직고했다.

그 노승이 바로 금강산 장안사의 대강백(강사)이자 해방 전 해인사 조실을 지내고 훗날 우리나라 선의 본가가 된 해인총림의 초석을 놓은 혼해 선사였다. 청정 독신승이 드물던 시대에 청정하게 칠십 평생을 살아온 고승이 남편 있는 여자에게 아이를 배게 했으니 “망령 난 중”으로 손가락질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흔 넘긴 청정 독신승 한 여인과 마음 맞아…
마을 내려와 2남1녀 두고도 예불·좌선 당당한 정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혼해는 16살에 삼척 천은사로 출가해 금강산에서 경을 본 뒤 경북 문경 대승사, 선산 도리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내원암 등의 선방에서 정진한 선객이었다. 혼해는 젊은 시절부터 김천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출세간을 넘나들었다. 시장통의 번잡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공부였다. 그 때 혼해는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도 화두심을 놓지 않아 김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물을 한 겨울에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오고가도 춥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노승은 세속에 살면서도 해인사 조실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규율이 엄한 대찰에 머물다 아무도 간섭하는 이 없는 속가에 나오면 곡차(술)를 들고, 곰방대에 담배를 무는 게 예삿일이었지만, 혼해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2남1녀의 자식을 두고도 그는 새벽부터 예불을 하고, 경을 읽고, 좌선을 했다. 함양에서 그를 시봉한 김명호 거사(86)와 해인사 한주 송월 스님(80) 등이 그를 지켜본 산증인들이다.


혼해는 이념다툼과 전쟁의 와중에 기구한 운명이 된 여인이 사형 당하거나 평생 옥살이로 삶을 마감할 옛남편의 고난에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쌀 30가마를 들여 그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혼해의 노력으로 여인의 남편이 마침내 석방되자 혼해는 그 여인을 옛남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나 사상범 일제 재검거령이 내려져 남편은 다시 감옥에 끌려들어갔고, 여인은 다시 함양에 왔다.

 

혼해의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를 아는 대찰에선 그를 다시 스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상주 남장사에 머물 때 윗반에선 태백산 각화사 서암의 전 선원장 고우 스님이, 아랫반에선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장 대원 스님과 구미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 등이 배웠다.

당대의 대강백이던 고봉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고우는 어느 날 혼해를 보고 짧다란 키에도 뭔지 모르게 당당하던 모습에 이끌려 야반도주해 남장사로 갔다. 고우가 방청소와 빨래까지 수발을 들며 가까이 지켜본 혼해는 오랜 세속 생활을 한 뒤였지만 절집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승려들보다 더 어김 없는 승려였다. 특히 그의 강설은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다른 강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금강경>을 배울 때 고우가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사위성에서 걸식을 하시고, 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고 첫 대목을 읽으면, “이 행동만으로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해 마쳤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혼해는 끊임 없는 물음으로 학인의 의문을 내면으로 돌렸다. 강사보다는 선사적 면모였다. 대원 스님도 그 시절 좌선을 하던 중 급작스런 혼해의 물음에 “하늘땅이 무너지는” 체험을 했음을 밝혔다.

“인간이란 좀 더 나은 위치에 서면 우월감에 젖어 뽐내기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속가에 처자식까지 둬 손가락질 받는 처지였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노구의 몸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고우는 “그런데도 그가 처자식을 뒀다는 사실이 뭔가 꺼림칙해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면서 “지금 같았으면 그런 분별심은 놓고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흙 속의 연꽃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혼해의 강설이 맴돌던 상주 남장사 일주문 밖 노음산을 지나 속세인 상주 시내로 접어드나 노음산의 그 하늘 그대로 아닌가.

'w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  (0) 2006.04.24
좋은 글  (0) 2006.04.06
오 마이 난자  (0) 2006.01.15
호모 루덴스, 나는 놀기위해 태어났다.  (0) 2006.01.15
단 한사람의 다른 생각이라도 누르지 말라  (0) 200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