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서울에 산 지 오래되면서도 나는 ‘서울 찬가’를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들 축에 낀다. ‘서울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것이 있다면 나도 거기 최소한 1년의 절반은 회원으로 참여할 생각을 갖고 있다. 왜 절반인가? 신화의 페르세포네가 1년의 절반은 지하에서 보내고 절반은 지상에서 보내듯이, 나도 반년은 ‘서혐모’에서 보내고 반년은 슬슬 기어 나와 내가 정말로 서울을 미워해도 되는지 경복궁 옆길 단풍나무 밑에서, 종로 바닥에 앉아,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내가 이런 주기적 순환을 선택하려는 이유는, 나에게 서울은 좋아하기에는 너무 끔찍하고 미워하기에는 너무 애처로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내게 서울이 끔찍한 이유는 장황해서 책 세 권을 쓰지 않고는 그 이유를 다 대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몇 가지 얘기만은 빠뜨리기 어렵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했는데, 나는 릴케가 ‘도시’라고 부른 것에 서울을 포함시키지 않을 재간이 없다. 서울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생각하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제 멋대로 솟아오른 추악한 거대 건물들, 도처의 난개발과 재개발, 매연 분사기 같은 자동차들, 아우성치는 광고 간판들, 수백 데시벨의 소음과 회색 먼지, 이런 것들이 이 도시를 장악한 도시의 점령군이다. 가장 많은 돈과 가장 비루한 것들이 모여 으스대는 곳, 상상력의 도살장, 운율도 이성도 없는 곳, 치장과 분식의 천재, 추악한 것들이 아름다운 영상을 뽐내는 곳, 거기가 서울이다. 속은 비고 몸집만 공룡처럼 부풀린 허영의 도시, 부황 든 것들의 고장, 혼을 팔아먹은 탐욕의 도시, 거기가 서울이다.
그 서울에서 아기들은 아토피에 걸리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은 유령처럼 손바닥만한 공원을 배회하고 젊은 친구들은 서푼짜리 환락부터 배운다. 별들은 이 도시가 보기 싫어 밤이 되어도 얼굴 내밀지 않는다. 강물은 찰랑대며 교섭할 모래밭을 잃고 콩크리트 둑에 몸 부비며 혼자 흐른다. 모든 곳에 관능은 차고 넘치되 그 모든 곳에서 생명의 에로스는 어디론가 도주하고 없다.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경주마처럼 헐떡이며 뛰고 내몰리고 펄떡거리지만 삶은 공허하고 피곤하다. 지친 혼들은 날개 부러져 물먹은 보자기처럼 한없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모든 곳에서 유혹은 너무 가깝고 구원은 너무 멀다.
그런데 그 서울은 애처롭다. 서울이 애처로운 가장 절절한 이유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무덤을 파야 하는 곳, 죽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 고향을 잃어버린 천사들의 도시,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바르고 선한 자들의 유형의 땅, 거기가 또한 서울이기 때문이다. 한 시절 젊은이들이 몽둥이에 머리 깨지고 최루탄에 숨통 막히고 닭장차에 실려가 쓰레기장에, 철창에, 물통 속에 버려지던 곳, 눈물 없이는 되돌아볼 수 없는 수많은 사건의 기억들이 묻힌 곳, 거기가 또한 서울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 모든 선량한 유배자, 모든 날개 떨어진 천사들은 애처롭다. 죽는지도 모르고 무덤을 파야하는 사람들의 맹목은 애처롭다. 알면서도 무덤 파는 사람들의 무기력은 애처롭다. 모든 상처와 모든 쓸쓸한 기억의 사원들은 애처롭다. 이 애처로운 사람들과 애처로운 것들의 도시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살지 못하면서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의 도시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실패와 성공, 시도와 좌절, 성취와 허탈이 한 몸으로 엉겨 있는 도시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서울 시장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나는 새 물길을 텄다는 청계천에 아직 가보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의 허영, 돈으로 칠갑한 또 하나의 난개발, 허황된 또 하나의 홍보물, 정신은 빠지고 돌덩이만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을 만날까봐 겁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생각도 없이 요란하고 시끄럽기만 한 또 하나의 삼류 이벤트, 문화는 없고 계산만 있는 또 하나의 무자비한 행정을 만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서울에 살면서 아직 청계천에 가보지도 않고 딴 소리 하는 자는 불쌍하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시장의 업적을 흠집내야 할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나는 서울을 아름답게 한다면서 점점 더 추악하게 만든 자들의 반역과 공모에 대한 기억을 아직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새로 지었다는 용산 국립박물관에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국립박물관은 서울시가 지은 것이 아니라 나라가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서울의 일부다. 국립박물관 덕분에 서울은 좀 더 나은 도시가 되었을까? 세계 6대 박물관에 낀다고 왕왕댄 텔레비전 방송들은 제 정신일까? 사실은 내가 그 용산 박물관 건물에 전혀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관 이전에 건물을 보았고 일부이긴 하나 내부 구경도 한 적이 있다. 연구와 수집의 능력, 운영예산 등을 제외할 때 건물보다 더 중요한 박물관의 조건은 소장품, 시설, 공간연출, 프로그램, 전시조직, 서비스의 기술 수준이다. 그러나 건물도 중요하다. 그런데 개관 이전 내가 잠시 둘러본 우리의 국립박물관 건물은, 설계자들에게 심히 미안한 얘기지만, 결코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게 내 평가다.
그 박물관 건물에는 예술이 빠져 있다. 규모만 있고 상상력은 없다. 건축적 조형력과 공간 디자인은 수준미달이다. 그것은 혼을 들어 올리는 건물이 아니라 내리 누르는 건물, 그래서 내가 혐오하는 서울에 잘도 어울리는 건물이다. 박물관을 위한 건축이기보다는 건축의 스캔들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또 하나의 건물을 다시 만날 용기가 내게는 아직 없다. 나는 아무래도 서울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한참 더 찾아야 할 모양이다.
도정일교수 2005.11. 04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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