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단 한사람의 다른 생각이라도 누르지 말라

by 오직~ 2005. 11. 5.
들루크루아(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고전 다시읽기/밀 ‘자유론’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서 정부는 항상 동네북이다. 사람들은 자기 몫을 제각각 외쳐대고 나랏일은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이 여론에 떠밀려 다니곤 한다. 그래서인지 평범한 소시민 중에서도 독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유신 때 같았으면 확 휘어잡았겠는데…”, “저딴 짓 하는 놈들은 북한 같으면 총살감이야.”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같은 반장이 아쉬워질 터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나와서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을 눌러버리고 일사분란하게 사회를 이끌어 갈 수는 없을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제도라고 배웠고 또 그렇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로 추락해 버릴 위험이 다분하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한 토론 과정을 거치느라 정책은 적기를 놓치기 일쑤고, 다양한 이해집단을 고려하다 보니 결론에 가서는 누구도 만족 못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정치를 바라고 실현하려고 했는가? 밀(1806~1873)의 <자유론>(On Liberty)은 여기에 대한 답을 주는 고전이다.

이 책에서 밀을 말한다. 전체 인류 중에 단 한 사람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를 억누르는 것은, 단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억누르는 짓만큼이나 나쁘다고. 그건 현재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한 강도짓과 진배없다. 혹시라도 그 한 사람의 의견이 옳다면 잘못을 밝히고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의견이 틀렸다 해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의견과 대비함으로써 다수 의견이 진리임을 더욱 생생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되고 만다.

 

무오류는 최고의 오류

 

지당해 보이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반대자는 패륜아에 버금가는 비난에 시달리게 될 터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조차도 ‘뜨거운 양심’, ‘정의의 분노’라는 식으로 정당화될 뿐이다. 하지만 책잡을 곳 없는 이론이나 신념은 있을 수 없다. 무오류성이야 말로 최고의 오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라면 진보는 없다. 역사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덕택에 발전한다. “천재는 오직 자유의 공기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법이다.” 진보는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된 곳에서만 이루어진다.

나아가, 비판의 자유를 허용하면 할수록 ‘사회의 건전한 통념’은 오히려 생동감을 얻게 된다. 밀은 기독교를 예로 든다.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들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신실한 신앙 또한 살아 있었다. 그러나 서구 세계를 재패한 이후에 기독교는 별 생각 없이 반복하는 습관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적군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교사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공부를 집어치우고 낮잠이나 자라가기 마련이다.” 사회의 주된 가치를 살아있게 하려면 반대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보다 되레 키우는 게 낫다.

만약 비판이 너무 강해져서 기존의 통념을 뒤집을 지경이라면 어떨까? 밀은 그런 문명이라면 차라리 하루빨리 사라지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미 몰락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사회는 이에 맞설 능력도 의욕도 잃어버린 탓이다. 물론 비판이 없다면 그 사회가 좀더 오래 연명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끝에는 과거 서로마제국이 그러했듯, 외부 침략이라는 더 불행한 몰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밀은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으로 ‘타인 위해의 원칙’(Harm to Others Principle)을 내세운다.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이의 자유를 방해할 경우에만 제한할 수 있다. 행위자 개인에게만 득실이 미치는 경우에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를 충고하고 설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정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게으르다는 이유로 그를 훈계할 수는 있지만 처벌할 수는 없다. 처벌은 그의 게으름으로 채권자의 권리가 침해받거나 가족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등,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는 경우로 한정될 뿐이다.

 

독재는 ‘우중’을 만든다 개탄

 

그러면 거꾸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인이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경우는 어떨까? 밀은 이 경우도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수많은 선택과 토론 속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키워나간다. 만약 현명한 사람이 중요한 결단을 대신해 준다면 그 사람은 성장을 멈춘 채 무능한 상태로 남게 될 터다. “근육이 그렇듯, 정신과 도덕적 힘도 자꾸 써야 커진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유능한 엘리트들이 우매한 대중을 무시하고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 줄 수 있다. 그럴수록 대중은 점점 더 어리석고 멍청해질 뿐이다. “사람들은 정부가 없을 지라도, 누구든지 즉석에서 조직을 만든 뒤 충분한 지적 판단과 결정 능력을 가지고 공공의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국민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민의 자질을 길러내는 데 민주주의보다 더 뛰어난 제도가 있을까?

<자유론>은 200쪽도 안 되는 책이지만, 왜 우리가 무질서와 비효율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충분하게 논증해 준다. <자유론>의 가치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입해 볼 때 더욱더 빛난다. <자유론>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마다 단골로 인용되던 고전이었다.

밀은 강대한 국가권력이 인간의 왕성한 정력을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고 개탄했다. 위대한 인간은 내면의 넘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 에너지를 더욱더 강력한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진정 뛰어난 문화 선도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독재국가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짓눌러 버린다. 획일화 교육 속에서 개인은 에너지를 죽이고 복종하도록 길들여진다. 북받치는 삶의 의욕이 없는 곳에서는 뛰어난 이성도 나올 수가 없다. 반면, 민주주의 사회란 악다구니 속에서 끊임없이 삶이 끓어오르는 곳이다. 개인들은 의지로 충만해 있고, 그 의지는 토론 속에서 ‘여론’이라는 형태로 정제된다. 넘치는 정력과 냉철한 이성, 민주주의는 혈기 넘치는 지성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제도다.

이러한 주장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입해 보자. 우리나라는 이제 ‘한류’로 상징되는 문화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독재에 향수를 느끼는 이들의 바램이 실현되었다고 해보자. 질서정연한 국가권력 속에서 ‘국풍81’ 같은 행사가 계속 이루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한류열풍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문화는 스파르타가 아닌 아테네에서 꽃폈다.

이 점은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국기’를 흔드는 발언을 엄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진리는 아무도 관심 없는 상식일 뿐이다. 국가의 정체성은 다양한 반론과 논쟁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그 가치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점에서 ‘지당한 상식’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충분히 보호되어야 한다. 이들이야 말로 오류를 수정하게 하고 진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우리사회는 이미 밀이 우려한 ‘자유롭지 않을 자유’(Free not to free)를 스스로 선택할 만큼 민도가 낮지 않다. 이제는 금기를 풀어야 할 때다.

 

▲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2005.11.03 햔겨레

'w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 마이 난자  (0) 2006.01.15
호모 루덴스, 나는 놀기위해 태어났다.  (0) 2006.01.15
서울을 위한 썰렁한 노래  (0) 2005.11.05
마이크로소프트사  (0) 2005.10.31
[스크랩] 생각의 감옥  (0) 200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