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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by 오직~ 2016. 3. 11.

필연적인 일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고 운명에 순응하기로 한 것.

 

고통들에 대한 예상은 그것들의 현존보다도 백배나 더 나를 괴롭히고 그 위협은 실제의 타격보다도 더 끔찍하게 견디기가 함들다.

 

심연의 가장 밑바닥에서 평온하게, 가엾고 불행한 인간이지만 신처럼 초연하게, 나 이제 여기 있다.

 

행복하기를 원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

 

나의 고갈되어가는 상상력은 나의 고독을 더 이상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들로 가득 채워주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운명과 그것을 만들어낸 타인의 정념에 대해 그토록 뒤늦게, 그토록 고통스럽게 얻은 지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만일 내가 운명에 대한 두려움에 빠진 채로 이성이 제공해주었던 위안 속에서 이제는 황당무계한 망상밖에 발견하지 못한다면, 만일 이성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을 파괴해버림으로써 역경 속에서 자신이 나에게 마련해주었던 희망과 확신의 버팀목을 온통 쓰러뜨려버린다면, 대체 무엇이 나를 절망에서 보호해준단 말인가?

 

나의 심정이 나의 이성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나자신에게조차 허망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가상(假象)들에 대해 양식 있는 신뢰를 가져도 되는 것일까?

 

 

고결한 거짓말이여! 그 어떤 진실이

너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자연의 모든 경향은-친절 그 자체도 예외없이-사회에서 조심성 없이 무분별하게 베풀어지거나 계속되면 본성을 바꾸고 종종 그 최초의 방향에 있어서 유익했던 것만큼이나 유해해짐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누구든지 간에 증오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위축시키고 압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불행에 겁을 먹은 상상력이 마침내 불행 쪽으로 작용해나가지나 않을른지..

 

내가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해보려고 애썼던 모든 설명들 속에서 나의 이성은 나에게 부조리함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모든 것의 원인과 수단과 방법은 나에게 실재하지 않는 것들과도 같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운명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을 내가 그 방향도 의도도 도덕적 원인도 추정해서는 안 되는 순수한 필연성의 수많은 현실태들로 여겨야만 하고, 이치를 따지거나 거역하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으니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

 

자존심이 참묵하고 이성이 말을 하게 되면, 마침내 이성은 우리 마음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불행에 대해 우리를 위로해준다.

 

모든 불행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기색, 어떤 몸짓, 어떤 모르는 사람의 눈길만으로도 나의 기쁨을 깨뜨리거나 나의 아픔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하다.

나는 혼자 있을 때에만 나 자신일 수 있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농락물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1776 집필 시작, 1782 출판)

장자크 루소, 옮긴이 조명애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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