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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밤이 선생이다

by 오직~ 2014. 6. 25.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강릉 경포대에는 달이 일곱개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경포 호수에 하나, 술잔에 하나, 앞에 앉은 여자의 두 눈에 하나씩, 그리고 내 마음에 하나

 

사람의 꿈은 사람 속에서 피어나 사람과 동행하지만 반드시 사람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온갖 종류의 대중물과 상업물에는 '시'가 충분하게 들어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를 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어떤 길목을 돌아서면 뒤에서 나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있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다만 이끼 낀 바위가 있거나 비범한 기운을 떨치며 솟아오른 나무가 있다. 그 바위와 그 나무가 나를 부른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 바위와 나무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하고 있던 내가 그것들을 지나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리라. 그 바위와 나무에 내가 걸어두었던 내 마음이 나를 부른 것이리라.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은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들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어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그러나 사람살이란 묘한 것이어서 우리는 투명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불투명한 것을 획책한다.

불투명한 것들이 투명한 것의 힘을 만든다.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저 불투명한 것들과 그것들의 근거지인 은밀한 시간에 달려 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수의적 기억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 많은 기억들이 저절로 쌓여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 뒤란에서 보았던 뱀, 미술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자던 밤 어둠 속에 떨어지던 싸락눈 소리, 어느 골목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 제사상을 밝히던 은성한 촛불과 얼룩진 병풍, 쥐구멍에서 꺼낸 반쪽짜리 곶감, 나는 이런 것들을 애써 외워둔 적이 없지만 그 기억들은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가 어떤 계기를 얻어 마치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처럼 눈 앞에 선히 떠오른다.

이런 불수의적 기억들이야말로 내가 이 몸을 지니고 사는 동안 세상 만물과 깊이 사귀어 온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 밤이 선생이다 (2013)

- 황현산 산문집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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