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8년여 소식이 끊어진 30년 지기 지인과 연락이 닿았다. 도시에서 사업을 하던 그이는 그동안 자신이 일구었던 모든 것을 털어버린 채 전화도 없을 뿐더러 인터넷도 되지 않는 산골에 틀어박혀 버섯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워낙 떨어져 있다보니 전화를 가설하려면 1.000만 원 이상의 돈을 들여야 한다기에 그냥 지낸다고 했다. 마침 이른 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경주로 촬영을 다니는 바람에 갈 때 마다 근처에 사는 그이에게 연락을 하곤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참 많이도 변했다 싶었다. 전에 같으면 어디 괜찮은 술집부터 찾았을 사람이 묵은 술이 있으니 집에서 한 잔 하자고 하질 않나 새벽에 산에 가서 두릅을 땄으니까 꼭 저녁을 먹고 가라며 발목을 잡곤 했다. 그이의 안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노를 치던 그니는 그 고운 손으로 산에서 나물을 캤으니까 또 밥을 먹고 가란다. 만난 지 채 열흘 남짓 할뿐인데 이래저래 벌써 서너 끼의 밥을 얻어먹었다. 어느 날은 마을 노인이 가져다 준 물고기를 졸여 놓았다고 유혹을 했다. 촬영을 하느라 녹초가 된 몸으로 찾아가 저녁을 먹고 그이가 만든 그네에 걸터앉았다. 산과 들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한눈에 내다보이는 산 아래의 저수지에서는 안개가 피어올랐다. 말없이 먼 산만 바라보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는 두말없이 그곳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 자리인 듯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 찾는데 50년 가까이 걸렸다며 너털웃음을 짓다가 별이 떴다며 하늘을 가리켰다. 과연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고 그이는 날마다 보는 것이지만 볼 때 마다 새삼스럽다는 투로 사치를 부렸다. 그리고는 어제 비가 왔으니 내일 새벽에 며칠 전 다녀 온 산에 다시 가야겠다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지난번에 갔을 때 미처 순이 올라오지 않은 두릅이 이번 비에 알맞게 자랐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자랑의 전부였다. 몇 해 째 묵히고 있는 맛난 술과 새벽이면 굼실거리며 피어나는 안개 그리고 맑은 공기와 별, 산에 지천인 나물과 저수지로 흐르는 개울에 그득한 물고기와 마을 사람들의 인심 말이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자랑 또한 대단했다. 어쩌다 흘러 온 도시 사람들이나 바구니 가득 잡아 가려고 종종거릴 뿐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 식구 입 가림 할 만큼만 잡고는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그곳에 들어가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늘 대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 다음을 기약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에 살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내 것으로 만들고 말아야하는 경쟁에 시달렸지만 이젠 달라졌다고 했다. 무엇이 달라졌냐고 물으니 욕심을 버릴 수 있었다며 구릿빛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 욕심을 버리고 나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스스로는 편안해졌다고 하니 과연 그 욕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곰씹어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이와 헤어지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서너 시간 동안 반드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백살 가까웠어도 날마다 농사일 그이는 7년 전, 경상북도 성주의 산골을 쏘다니다가 만난 문상의 옹이다. 내가 그이를 만날 즈음이 주민등록상으로 96살이었으니 출생신고를 2~3년은 묵혀서 한 옛날을 되새겨보면 그때 이미 100살 언저리였을 것이다. 그이는 나에게 너무도 큰 선물과도 같았다. 내 삶에서 그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더없이 큰 행운이었다. 그는 도시 사람들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빠름에 대한 상대적인 느림이 아니라 그 낱말이 지닌 본연적인 가치의 느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이는 100살이 가까웠음에도 농사일을 거르지 않았다. 그것도 논농사며 밭농사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옷은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늘 양복바지에 셔츠 차림이었다. 허리벨트는 그저 넥타이를 질끈 묶었을 뿐 내가 그이를 본 4년 가까이 단 한차례도 허리끈이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겨울이면 걷어 올린 바지 섶을 내리고 위에 두툼한 겉옷 하나를 걸치면 그뿐이었다. 그것도 모두 도시에 나가 사는 아들이 입다가 만 옷이라고 했다. 신발은 겨울이면 털신을 신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장화의 목과 뒤꿈치를 잘라 낸 것 하나가 전부였다. 농사를 짓지만 기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도구는 그이 자신의 몸인 듯 했다. 그 다음으로 농사를 거들어 주는 것은 18년이나 같이 산 황소 한 마리가 외양간을 지키고 있었으며 서너 자루의 호미, 낫과 삽 그리고 곡괭이와 가래, 산에 가서 약나무를 해올 때 쓰는 도끼와 톱 정도가 광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쟁기질이나 써래질은 소와 함께 하고 모를 심을 때도 이앙기 대신 그이의 두툼한 손이 대신 했다. 그것도 줄을 맞춰 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엄벙덤벙 툭툭 던져 넣는 투모였다. 밖에서 논 안으로 모를 던지고 다시 논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눈대중으로 흩어 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질서정연하게 모가 꽂힌 다른 논과는 달리 그이의 논은 그저 성기기만 했다. 이앙기로 하면 한번이면 될 일을 그이는 반복적으로 되짚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기계 쓰는 것을 알지도 못할 뿐 더러 이제 와서 그것을 배워서 어디다 쓰겠냐고 한다. 아랫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기계를 가지고 와서 도와준다고 해도 손사래를 치는 것은 그래야만 논에 한번이라도 더 나갈 수 있으며 세상의 모든 농작물은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믿음이 크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농부 발소리 듣고 자라
그러나 정작 내가 그이에게 놀란 것은 뻐꾸기 울음소리가 골짜기에 낭랑하게 울려 퍼질 무렵이었다. 모내기를 마치고 고추까지 심고 난 어느 날, 그이는 외양간에 있던 소를 일으켜 세워 들로 나가기 시작했다. 18년이나 궂은 농사일을 한 그 소는 여느 육우와는 달리 깡말라 있었다. 이윽고 외양간에서 나온 소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이는 결코 소가 가는 길 앞으로 나서서 소를 이끌지 않았다. 그저 소가 가는대로 따라 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 외양간에서 채 50m도 떨어지지 않은 들판까지 가는데 무려 30분도 더 걸렸다. 소가 그곳까지 가면서 계속 풀을 뜯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달음박질을 하면 채 10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며 서붓서붓 걸어도 1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리이건만 그이는 다만 고삐를 잡고 있었을 뿐 소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참다못한 내가 그이에게 물었다. “할배요, 빨리 가서 묶어 놓고 딴 일하지 와 이래 있능기요” “봐라, 소도 한 철이라. 내가 저다가 묶아뿌마 거 있는 거마 물 수 있는기라. 그라이 지 묵고 싶은 거 다 묵도록 내삐리 놔야지, 인자 저 풀들도 올해 지나마 내년이나 돼야지 또 나올낀데 안 그렇나.” 하는 것이었다. 마치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은 후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소와 함께 거니는 그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욕심이 앞서서 그이가 조금이라도 움직여 주면 좋겠다 싶었던 속좁은 생각이 들통나버린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사진이고 뭐고 모두 팽개친 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일천한 독서양이지만 지금껏 그 어떤 책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말이었고 그 어떤 내로라하는 선생들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그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는 열 살 남짓할 때부터 농사일을 시작했을 뿐 학교는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땅을 일구고 하늘을 바라보며 지냈을 뿐 욕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누구의 선물 될까
하늘이 그렇게 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람이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욕심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그이는 존재 자체로서 나에게 큰 선물이며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내 속에는 아직도 그것이 팽배하다. 우리 모두 멈춰 서서 생각해보자. 우리들은 그 누구에게 귀한 선물이 될 것이며 잔잔한 꽃다지로 피어날지 말이다.
20060421 한겨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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