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끝났다. 우승자가 결정됐다. 36초94. 대한민국 대표 이상화를 포함해 모든 경쟁자들을 압도적 차이로 떨어뜨려 놓은 기록.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 부문의 올림픽 신기록이 나왔다.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선수의 얼굴을 잡는 카메라 화면 아래로 자막이 뜬다. “고다이라 나오(일본), 31세”
31세? 신체능력이 절대적인 기초 종목에서 30대의 우승자를 보는 것도 낯선 일이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축구 국가대항전조차 들여다보지 않을 정도로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지만, 선수 황혼기까지 한 세계를 지배하는 절륜한 천재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수는 없지 않은가. 31세의 우승자라면 십년 이상 독재자와 같은 전성기를 보냈을 테니 그 이름은 이미 김연아나 우사인 볼트, 혹은 마이클 조던과 같은 반열에 올랐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 기간 동안 내가 들어왔던 이름은 이상화, 이상화, 이상화뿐이었다.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 부문에 출전하는 세계 유일의 선수인 것처럼 그 이름만이 들렸다. 이상화의 유력한 경쟁자로 거론되는 이름은 매번 바뀌었지만 결승선 근처에서 그들은 늘 우승자의 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이상화의 경쟁 후보군에서 고다이라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녀가 올림픽 무대에서 이상화보다 한뼘 낮은 단상에 올라 겸손한 2인자의 축하를 건네는 광경을 본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저 선수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지?
그 자리에서 검색해 보았다. 신체적 전성기인 20대까지 메달과는 인연이 없던 선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의 은퇴 시기인 28세에 네덜란드로 선수 유학을 떠났다. 28세에!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이상화 선수와 이미 은퇴하고 평창겨울올림픽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김연아 선수의 현재 나이가 그즈음이다.
평생 스케이팅 습관을 버리고 주법을 바꾼 고다이라는 코치로 활동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에 그저 그런 선수에서 세계 최정상 선수로 발돋움했고 500미터 부문 올림픽기록, 1000미터 부문 세계신기록, 25연승 기록을 수립했다. 무슨 삼류 작가가 붙어 급조된 일본 애니메이션 줄거리처럼 들렸다. 수치심을 아는 작가라면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국가대표 선수가 극복한 개인적 난관은 화제가 되곤 하지만 고다이라가 극복한 건 난관이 아니었다. 국가대항 스포츠이자 기록 대회인 올림픽의 성격 자체를 극복해 버렸다. 동료의 은퇴를 지켜보는 나이까지 국제무대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가 장기간 해외유학을 떠나 평생 익혀왔던 기본기를 통째로 바꾸는 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도박이다. 오직 금메달을 위한 투자라면 말이다. 아마추어나 내릴 법한 선택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고다이라는 기업 후원을 받는 대신 병원 직원으로서 급여를 받는 아마추어 선수라고 한다. ‘무엇이 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좇는 태도가 만들어낸 삶의 차이였다.
스포츠 성공 신화에 처음으로 감동을 받았다. 이상화 선수를 존경한다는 고다이라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당신이 속한 스포츠보다도 당신을 존경한다. 기록보다 압도적인 인간성을 보았다. 고다이라의 스케이트 같은 글을 쓰고 싶고, 고다이라의 스케이트 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고다이라의 스케이트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쩐지 대한민국이 획득한 금메달 개수보다 이 일본 스케이팅 선수 한 명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을 훨씬 더 오래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 그런 게 국가보다 위대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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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3080.html#csidxb9d59f6bc6fc29a9f506a97fab510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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