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신도비’에 전하기를 진린 제독은 전쟁이 끝난 뒤 선조대왕을 만났을 때 “이순신은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보천욕일’이란 중국의 복희와 여와 신화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순신 장군은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빈 방문할 때 어느 곳을 찾아가는가에는 상징성이 있다. 국방과 관계된 이슈가 있을 때는 대개 국립묘지를 참배한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방문 때 찾아간 곳도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묘지였다. 1984년 고르바초프가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찾아간 곳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한 대영도서관이었다. 당시 그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했다.
한 나라를 찾아온 외국 원수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양국 현안에 대한 속뜻이 은연중 들어 있다. 2014년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서울대 강연에서 뜻밖에도 정유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제독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며 역사적 친근감을 표시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진린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공을 가로챈 고약한 사람으로 그려진 이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진린은 1598년 7월 전함 수백 척과 2만여의 군사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의 진지가 있는 고금도 덕동리 뒤편, 묘당도가 보이는 해변에 주둔하였다. 이때 진린 제독은 진지 한쪽에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진린은 처음에는 대단히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순신 장군을 만난 뒤 태도를 바꾸었다. 정조대왕은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를 쓰면서 “진린은 충무공의 뛰어난 책략과 인간적 도량에 마음으로 탄복하고는 군사의 모든 기밀을 충무공의 자문을 받아 결정했다”고 말했다.
진린이 이순신 장군을 얼마나 존경하였는지는 그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한때 조정 대신의 모함을 받아 통제사 지위를 빼앗긴 바 있는데 전란이 끝난 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걱정된다며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의 신하로 삼아 황해를 맡기라고까지 권했다.
그해 11월 이순신과 진린은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물리쳐 전쟁을 끝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1월19일 이순신 장군은 총탄을 맞고 순직하였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주었다는 팔사품(八賜品, 보물 제440호)도 한서대 장경희 교수가 최근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진린 도독이 제1대 통제사 이순신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주고 간 것이라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에 전하기를 진린 제독은 전쟁이 끝난 뒤 선조대왕을 만났을 때 “이순신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보천욕일’이란 중국의 복희와 여와 신화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순신 장군은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을 이처럼 한없이 칭송했던 진린 제독이었다.
진린은 고금도를 떠나면서 남은 재물을 섬사람들에게 주면서 관왕묘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하였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귀국 후 광둥(광동) 도독을 지내고 있던 진린은 1607년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644년 명나라가 끝내 청나라에게 망하자 진린의 손자 진영소(陳泳?)는 오랑캐에게 짓밟힌 조국에 살 수 없다며 수하의 수병 5명과 함께 고금도로 건너와서 관왕묘에 있는 할아버지 진린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이후 진영소는 고금도에서 경주 이씨와 결혼하여 살다가 해남으로 이사했다. 이렇게 조선에 정착한 진린의 후손들은 스스로를 광동 진씨라고 했고, 지금도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는 광동 진씨가 60여가구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전국에는 약 2천여명(2015년 기준 2397명)의 광동 진씨가 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진린 제독 언급 이후 추궈훙 주한 중국대사는 해남 황조마을의 진린 제독의 후손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후 매년 해남과 진도를 잇는 명량(울돌목)에서 열리는 축제 때 이순신과 진린의 후손이 손을 잡고 배에 오른다고 한다.
나는 고금도의 이 관왕묘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 지난 6월 ‘합수 윤한봉 선생 10주기’를 맞아 추모객들과 함께 강진 생가에 갔다가 거기서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는 고금도를 답사하였는데, 진린이 세운 관왕묘는 이순신 장군의 ‘충무사’(忠武祠)로 변한 지 오래되었고 진린 제독의 자취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긴 사연이 있었다.
진린 제독이 고금도를 떠난 뒤에도 관왕묘는 변함없이 잘 지켜졌다. 그리고 현종 때(1666년)는 관왕묘를 중수하여 중앙에 관우, 동무에 진린 제독,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숙종 때(1713년)는 이이명 대감이 “이순신은 벼슬이 비록 정2품에 그쳤지만 그 공로는 건국 이래 없던 것이었으니 해마다 봄가을로 관원을 보내 숭배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라고 건의하여 향사가 국가적 제향이 되었다. 이때 이이명이 쓴 ‘고금도 관왕묘비’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정조는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하면서 고금도에 관왕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1791년, 구원군을 보내준 은혜에 보답하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탄보묘’(誕報廟)라는 사액을 내려 묘격을 올렸다. 이와 동시에 노량대첩 때 전사한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 장군도 동무의 진린 곁에 함께 모시게 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와 총독부가 1922년 관유(官有)재산 처분령을 내려 훼철 위기를 맞았다. 이때 고금도 유림이 계를 조직하여 관왕묘와 부지 1550평을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보존하였다. 그리고 1940년 무렵 총독부가 항왜 유적이라며 관우상을 부수어 바다에 던져버렸고 관왕묘 또한 훼철될 위기를 맞았을 때 고금도 사람들은 기지를 발휘해 관왕묘를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보존하였다. 국권을 잃었을 때 민이 나서서 지킨 것이었다.
8·15 해방 후, 1947년 11월19일 이순신 장군 기일을 맞이하면서 관왕묘에는 다시 제향이 올려졌다. 1953년에는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고 옥천사를 경외로 옮겼다. 그리고 1959년에는 정전에 아예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동무에는 충무공을 보필했던 이영남 장군을 배향하였으며 1960년에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진린 제독이 세운 관왕묘는 이렇게 이충무공 사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고금도에는 관왕묘도 진린 제독의 자취도 없게 되었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지금 이순신 장군의 진지가 있던 덕동리에는 임진왜란 유적지 정비사업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참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은 그곳에 새로 지어 모시고, 묘당도의 관왕묘는 원래대로 복원하여 정전에 관왕, 동무와 서무에 진린 제독과 등자룡 장군, 혹은 이순신 장군, 이영남 장군까지 모시는 것이 공간의 진정성을 살리는 길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중국에 갔을 때 최치원이 근무했던 양저우(양주)의 당성, 원측 대사 사리탑이 있는 시안(서안)의 흥교사를 찾아가듯이, 유커들이 관왕과 진린 제독을 찾아오고, 덩샤오핑의 후손들이 등자룡 장군에게 참배를 드리기 위해 일부러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막연히 동묘라 불리어오던 서울의 동관왕묘가 근래에 비로소 그 문화재적 가치가 재평가되어 바야흐로 유적 정비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듯이 고금도 관왕묘도 반드시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81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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