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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간 삶 옥죈 보안관찰법에 맞서는 #내가 강용주다!

by 오직~ 2017. 5. 13.

한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멍에처럼 지고 살았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마지막 시민군이었던 열여덟 살의 소년은 도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카빈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의 소년기는 그날로 끝이 났다. 82년 전남대 의대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는 85년 안기부에 체포된 후 두 달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간첩’이 되었다. 그는 폭도였고 빨갱이였고 ‘쓰레기통에 처박힌 영혼’이었다. 그가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간 복역하며 전향서와 준법서약서를 끝내 거부한 것은, 무너진 자신을 바로 세워 망월동 묘지 앞에 떳떳이 서겠다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출소 후 의사가 되어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던 강용주는 요즘 18년간 그를 옥죄어온 보안관찰법에 정면으로 맞설 것을 선언했다. 국가폭력에 맞서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지키려는 그를 지지하며 많은 이들이 ‘#내가 강용주다!’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봄날이라고 다 같은 봄날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기뻐하고 안도하고 축하하는 봄날에도, 누군가는 미세먼지 자욱한 고공에서 농성을 벌이다 탈진하고, 누군가는 모로 누운 선실의 뻘흙과 철판더미 아래에서 자식의 흔적을 찾느라 애태우고, 누군가는 고향마을에 난입하는 군 트레일러를 막겠다고 고단한 노숙을 한다. 어떤 이에게는 이 5월의 봄날이 ‘장미대선’의 축일이지만, 누군가에겐 37년 전 5월의 아픔과 상처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악몽의 기일이다. 이 좋은 날, 왜 여전히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냐고 윽박지르는 것은 야만이다. 기쁨은 슬픔에게 빚이 많다.


     
“연약한 인간이 사람으로서 자신을 생각할 때 포기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거예요. 더 이상 비겁할 수 없는 막다른 지점. 전향제도와 저와의 싸움이란 건 그래요. 보안관찰법도 마찬가지고요.” 지난달 28일 열린 첫 공판에서 그는 ‘어느 순간에도, 어떠한 불이익이 오더라도’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강용주(55)는 슬픔을 섣불리 위안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깊고 예리한 고통의 흔적을 품고 살아왔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의 죽음을 생생히 목격한 소년 시민군이었고, 85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발표한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4년간 복역한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였다. 99년 출소한 뒤 뒤늦게 복학해서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고, 5·18 피해자를 위한 ‘광주트라우마센터’ 초대 센터장,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진실의 힘’ 이사를 맡는 등 자신처럼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과 함께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그런 강용주가 최근 다시 법정에 섰다. 보안관찰법상의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쿠!’ 하는 탄식이 저절로 새나왔다. 몇 년 전 사석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는 시종 유쾌하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오랜 고난의 기억을 뒤로하고 평범한 생활인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라도 왠지 모를 부채감을 떨쳐버리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그런데 지난달 28일 열린 첫 공판에서 그는 ‘어느 순간에도, 어떠한 불이익이 오더라도’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왜 타협하지 않을까? 투철한 사상범이라서? 타고난 독종이라서? 강용주가 그토록 단호하게 싸우는 이유는 뭘 지키기 위해서일까? 적당히 느슨해지려는 신경줄에 따끔한 불침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선을 일주일 앞둔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위치한 그의 진료실로 찾아갔다.


보안관찰법에 불복종하는 이유

그가 진료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 그의 병원 아담한 로비에 마주 앉았다. 짧은 곱슬머리에 동그란 안경, 줄무늬 나비넥타이가 멋스러웠다.


-진료할 때 이런 복장으로 하세요?

“넥타이는 시술할 때 거치적거려서요. 세균의 온상이기도 하고. 노타이로 하기도 그렇고…. 보타이가 싸요. 하나에 3천원.(웃음)”

환자들은 넉살좋게 웃음 짓는 이 의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까?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진열장에 각종 감사패와 위촉장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홍보대사로 활동한 데 대한 감사패도 놓여 있었다.


-보안관찰법 재판에 대한 기사를 보고, 아직도 이런 게 있었단 말인가 새삼 놀랐어요. 99년에 출소해서 의사로 살고 있는데, 현행법상 뭐가 문제가 된 거죠?

“보안관찰법의 신고의무 불이행이죠. 보안관찰 대상자가 되면 3개월에 한 번씩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놀러 갔고 그다음에 생활비는 어디서 벌어서 했고, 거주지를 10일 이상 떠나거나 국외여행을 하게 되면 누구랑 어디를 갔고 목적이 뭔지 신고해야 하고요, 그 외에 관할경찰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모든 내용을 신고하게 되어 있어요.”


-보안관찰은 사상범만 대상으로 하나요? 일반 형사사범은 해당이 안 되고요?

“보호관찰과 보안관찰은 다른 건데요.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일반수가 형집행정지로 나온다든가, 성폭력범이 전자발찌를 차고 나온다든가 하는 건 보호관찰이에요. 이건 기한이 정해져 있고 법원이 결정하죠. 이런 처분은 어느 나라에나 있어요. 반면에 보안관찰법은 이미 형을 다 살고 나온 사람을 상대로 해요. 이중처벌인 셈이죠.”


-보안관찰법은 다른 나라엔 없어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인 문제로 보안처분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역사상 예를 든다면, 1차대전 후에 유럽 파시즘이 이런 제도를 뒀었고,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이 있는데, 일제가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없어졌죠.”


-일본에도 없는 게 우리나라에만 남았군요.

“파시즘 법률이니까.”


-중간에 재심사 기회도 없어요?

“2년마다 한 번씩 하게 되어 있는데, 이게 법원의 결정이 아니라 법무부 처분에 의해 갱신이 돼요. 최장 몇 년까지 할 수 있다는 기한도 없고요.”


-그럼 평생 갈 수도 있다고요?

“네. 무기한이요. 그러니까 새로운 ‘신분법’이라고 할 수 있죠. 근대시민사회가 신분을 타파하는 건데, 이건 새로운 ‘신분’이니까.(웃음)”


-보안관찰법에 대해서 위헌제청신청을 하겠다고 하셨어요.

“보안관찰 폐지를 주장하면 보안관찰 갱신의 이유가 돼요. 뭐 이런 법이 있어요? 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면 이 법으로 처벌을 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니에요? 유신헌법 당시에 긴급조치 1, 2, 9호가 유신헌법에 대해서 폐지를 주장하거나 반대하면 처벌한다는 거였잖아요? 어느 민주국가에서 그 법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고 처벌을 한답니까? 이건 법이 아니라 폭력이에요.”



전두환에겐 없고 강용주에겐 있는 것

보안관찰법 1조(목적)는 “특정범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해” 보안관찰처분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형법상의 내란죄나 군형법상의 반란죄, 국가보안법상의 특정 죄목으로 3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 “재범의 방지를 위한 관찰이 필요한 자”에 대해 보안관찰처분을 하는데, 그 정확한 숫자는 “국가기밀”이라고 해서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국정감사 때 일부 공개된 내용을 보면, 전체 2500~2600명 대상자 가운데 보안관찰 피처분자는 43~46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휘말려
14년 감옥살이한 ‘비전향 장기수’
출소 뒤 2002년부터 보안관찰 처분
3개월마다 행적 경찰서장에 신고의무
보안관찰법 위반 혐의로 다시 법정에

내란죄·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재범 방지하겠다며 ‘보안관찰’
법무부가 2년마다 처분 재심사
기한규정 없어 ‘무기한’도 가능
‘내란 살인’ 전두환은 처분 안받아


-보안관찰법에 보면 형법 88조, 내란목적살인죄도 분명히 대상자로 들어간다고 쓰여 있던데, 전두환은 그걸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해외여행도 다니고 골프도 치러 다니죠?

“29만원밖에 없어서 그런가 봐요. 난 30만원 이상 있는데.(웃음)”


-전두환은 처분을 안 받고 강용주는 처분을 받는, 그 기준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건 엿장수 맘이죠.(웃음) 왜 전두환이랑 노태우는 보안관찰 처분을 안 받느냐고 정보공개청구를 한 사람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 내용도 기밀이라고 공개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황당하군요.

“법이 법으로 존립하려면 형평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나라는 내란이나 반란죄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이가 국가보안법보다 더 관대한 처벌을 받아요. 전두환이 회고록에서 ‘5·18은 폭도들이고 난동이라고, 자기는 5·18 씻김굿의 희생양’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훨씬 재범의 위험이 큰 건데.”


-보안관찰법 11조에 보면 “법무부 장관이 처분 면제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이전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면제가 안 되었다는 건 좀 이해가 안 되네요. 조작간첩사건인 줄 알았을 텐데요.

“내가 재밌는 얘기 해드릴까요? 제가 2002년에 보안관찰처분을 받고 이것에 대한 취소행정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했어요. 이 사건을 세 명의 변호인이 맡았고요. 그런데 제가 2004년 1월7일날 보안관찰 갱신처분을 받았어요. 근데 그 갱신처분을 낸 법무부 장관이, 내 보안관찰 취소소송을 맡았던 변호사예요. 그분이 법무부 장관이 돼서.”


-어떻게 그런 일이?

“얘기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2008년에 고문피해자, 조작간첩을 치유하고 상담할 목적으로 ‘진실의 힘’이 만들어졌어요. 저도 가정의학과 전문의 따고 합류했는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제안을 해서 그쪽 공간을 쓰기로 하고 대여섯 번 만났나. 근데 나중에 뭐라고 하냐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예산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만 쓰게 되어 있다고, 조작간첩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니까 안 된다고.”


-이전 시기에 있었던 고문이나 잘못된 법 적용으로 피해자가 생겼으면, 그걸 바로잡는 게 적폐청산 아닌가요?

“적폐를 쌓아온 거죠. 2004년, 2008년…. 내가 의지하고 내 편이라고 믿는 사람들한테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내게 제일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요. 안기부 고문실과 법정에서 ‘빨갱이, 간첩’이라고 몰아세울 때, 변호사가 없어서 말 한마디 못했어요. 당시 인권변호사들이 ‘이 사건은 안기부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사건이라서 못 맡겠다’고 아무도 선임계를 안 냈거든요. 민주세력이라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한 공감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죠.”


-특별히 정치활동이나 비합법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분도 확실한데, 왜 아직도 보안관찰 피처분자로 찍어두고 있는 걸까요?

“그냥 괘씸죄죠. 나랑 같은 사건 공범들도 보안관찰에서 다 해제가 되었는데, 나만 빠졌어요. 국가가 자기들의 폭력적 법 집행에 대해서 거부하고 반항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겠죠.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을 억압해서 길들이겠다는 거고.”


-14년간의 긴 감옥살이를 마치고 뒤늦게 복학하고 의사가 돼서 50대 중반이 되었는데, 내가 이 나이에도 이러고 살아야 되나 회의스러운 적은 없어요?

“지난해 12월에 포천요양병원에서 진료하고 있는데 영장도 없이 잡으러 왔더라고요.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아이 피곤하네.(웃음) 사람 좀 놔두지, 날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나. 내가 싸움닭도 아니고….”


-싸움닭 같은데요.(웃음)

“아니, 자기들이 링으로 날 불러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거죠. 2010년도에 약식기소로 벌금 150만원 나왔을 때도 내가 싸우려고 들었으면 정식 재판 청구하죠. 나도 조금씩은 비겁하게 살기 때문에(웃음) 그냥 냈단 말이에요. 근데 이번엔 기소를 해서 형사재판에 부쳤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요. 조금 비겁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많이 비겁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렇게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원칙적인 싸움을 하는 거죠.”


내 영혼이 쨍하고 금 가던 날

-나이는 50대 중반이지만 그간의 인생행로가 너무나 파란만장해서 남들 300년 동안 겪을 일을 50년 안에 다 겪은 분 같아요.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광주에서 나고 자랐어요. 부모님은 두 분 다 통영 사람인데, 외가 쪽은 선비 집안에 외삼촌이 수산전문대 나오고 신문기자까지 했던, 말하자면 좌파 인텔리 집안이었죠. 일제 때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거나 감옥에서 돌아가신 분도 많고요. 저희 친할아버지는 통영에서 유명한 고리대금업자였어요. 우익이었는데 48년도에 어디론가 끌려가서 돌아가셨죠. 좌우갈등으로 양쪽 집안 모두 화를 당하니까, 아버님이 고향 싫다고, 아무 연고 없는 광주로 멀리 이사를 왔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홀로 6남3녀를 키웠다. 용주는 그 가운데서도 엄마가 가장 미더워하는, 착실하고 쾌활한 아들이었다. 80년 5월18일, 동신고 3학년이던 강용주는 금남로 한 제과점에서 여고생들과 미팅을 하러 나갔다가 계엄군의 무차별 살상 현장을 목도했다. 그 순간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친구들과 교회 등사기를 훔쳐다가 광주 고등학생들에게 보내는 유인물을 밤새 찍어냈다.


-무섭지 않았어요?

“두렵다는 생각보다는 분노가 컸어요. 어떻게 시민을 군인들이 그럴 수 있을까? 제가 총을 들었던 건 26일 저녁이었어요. 그날 밤 도청에 계엄군이 진압을 하러 온다고 하니, 광주를 지키자. 그래서 어머니한테 큰절하고 도청 앞으로 갔죠.”


-어머니가 붙잡지 않으셨어요?

“가지 말라고 말리셨죠.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누군가는 광주를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무조건 갈랍니다’ 하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우시다가 잠깐 기다려라 하곤 나가서 담배 두 갑을 사오셨어요.”


-아, 어떻게….

“어머니가 주신 담배 두 갑을 들고 큰절 올리고 도청 앞 와이엠시에이(YMCA)로 갔죠. 그때 일은 세세하게 기억이 안 나요. 트라우마 탓인가 봐요.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흐릿하고 차가웠다는 기억만 남아 있어요. 최후항쟁을 하겠다고 간 거니까. 무조건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부산항에 미군 항공모함이 와 있다, 인권대통령 카터가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보낸 미군이 지금 광주를 향해 오고 있다고, 오늘 밤만 견디면 미군이 우릴 지켜줄 거라고 믿었죠.”


-싸워 이길 거란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목숨을 걸고 거길 갈 수 있죠?

“문재학이라고 당시 광주상고 2학년 아이가 있었어요. 재학이가 도청 기동타격대로 있는데 그 아버지가 재학이를 데리러 오셨죠. 그때 재학이가 이랬어요. ‘친구 하나는 21일 집단발포로 죽고, 한 명은 22일 죽었어요. 친구들이 여기서 다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버리고 갑니까?’ 하고요. 난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죽었어요. 나보고 왜 거길 갔냐고 물으셨죠? ‘내가 바로 너다’ 하는 마음. 재학이가 죽은 친구가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듯이.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공감과 연대,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갈 거고.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던 건 ‘우연’이지만, 누군가 거기 ‘필연’적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우연한 개인이 역사의 현장에서 필연적인 역할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강용주는 카빈총을 들고 도청 앞 수협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도청에서 신호가 오면 일제히 사격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윽고 도청 앞으로 계엄군 척후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도청에서 콩 볶듯 총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사격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울리던 총소리가 멈추고 찬물을 끼얹듯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밝아오는데 시민군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걸어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총을 버리고 담을 넘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선무방송이 들려왔다. “폭도들은 들으라. 너희들의 아지트는 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투항하라. 투항하라….”


그깟 전향서 한 장이 대수냐고??

강용주는 1년 늦게 고등학교에 복학하고 82년 전남대 의대에 입학했다. 학살을 지휘한 자들은 권력을 잡았고 5·18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되었다. 그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85년 9월9일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공작원에게 포섭당한 미국 유학생과 국내에서 암약하던 간첩단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었다. 강용주는 고교 선배인 미국 유학생 양동화의 지령을 받고 학원가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80년 5월 광주 죽음 목격한 고3
홀어머니 만류에도 총 들었지만
계엄군이 시민군들을 진압하던 날
온몸 사시나무처럼 떨며 도망쳤다

82년 전남대 의대 진학해 학생운동

32년전 간첩 활동 거짓 시인한 건
한대라도 덜 맞으려 써준 대로 외워
폭력에 굴복해 개가 된 내 자신…
더이상 포기할 수 없어 전향 거부
“사상 문제로 이중처벌 나라 드물어”


-85년 9월9일 사건 발표가 났는데, 바로 다음날인 9월10일 엠비시(MBC)가 <학원에 뻗친 붉은 손길>이란 1시간짜리 특집방송을 내보냈어요. 거기 사건 관련자들이 나와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활동을 했다고 시인하는…. 거기 출연하셨나요?

“했죠. 팬티 한 장이 주는 위안이 있다는 거 아세요? 제일 무서운 게 그놈들이 수사하다가 ‘야, 옷 벗어. 팬티까지 벗어’ 그러면 아무것도 방어할 게 없어요. 벌거벗은 몸으로 폭력 앞에 내동댕이쳐지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고문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인간을 죽음 직전의 고통까지 몰고 가요.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자존감, 자기정체성을 근원에서부터 무너뜨려요. 한 대라도 덜 맞으려고 써준 대로 달달 외워서 했어요.”


-누구든 고문 앞에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지만, 그걸 방송에까지 나와서 공개적으로 했으니, 이후에 심리적 상처도 컸겠어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죠. 내가 감옥에서 전향서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 처음엔 자신을 계속 합리화했어요. 누구나 폭력에는 어쩔 수 없어, 매에는 장사가 없잖아…. 근데 어느 순간 그 한계선에 봉착하더라고요. 폭력에 굴복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된 자신, 쓰레기통에 처박혀서 울고 있는 상처 입은 내 영혼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중의 하나였어요. 그렇게 무너져서 살든가, 그 상처투성이 속에서 다시 한번 일어서든가.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서 망월동에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전향서나 준법서약서를 거부해서 옥중에서 고생을 많이 했죠?

“86년도에 대전교도소에 가서도 전향 안 한다고 몇 년 동안 꽁꽁 묶여서 개밥(손을 뒤로 묶은 채, 입을 대고 밥을 먹게 하는 징벌)을 먹기도 했고 92년 대구교도소, 96년 안동교도소 가서도 그랬어요. 칼날 위에 서서 내가 칼날이 돼서 살고 있는 거였어요. 나는 강철 같은 인간이 아니고 5·18을 겪고 총을 버리고 도망치고, 남산 안기부에 가서 고문에 굴복하고 주절거리는 개가 되고, 그렇게 흔들리고 넘어지고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잖아요. 그 연약한 인간이 사람으로서 자신을 생각할 때 포기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거예요. 더 이상 비겁할 수 없는 막다른 지점. 전향제도와 저와의 싸움이란 건 그래요. 보안관찰법도 마찬가지고요.”


-‘그까짓 전향서 한 장이 뭐라고 그렇게 힘들게 버티셨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어요.

“그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왜 그렇게 기를 쓰고 국가권력은 그걸 받아내려 했을까요? 전향이라는 말 자체도 일본 애들이 만든 거예요. 민족해방운동가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향을 요구했죠. 그 종이 한 장 쓰고 나가서 또 (활동)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하지만, 전향을 한 사람들은 결국은 운동 일선에서 다 탈락했어요. 그깟 종이 한 장이 아닌 거죠. 한 인간의 영혼을 국가권력이 굴복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굴복하면, 한 인간의 존재가 파괴돼요.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선 그걸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거고요.”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이제 다시 5·18이 다가옵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상처가 덧나는 이른바 ‘기념일 반응’(anniversary reaction)이란 게 있다죠? 세월이 꽤 흘렀는데, 지금도 그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신가요?

“트라우마라는 게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거예요. 몸은 여기 있지만 영혼은 그날 그 자리에 갇힌 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건, 그날 그 자리를 회피하는 게 아니고, 그날 그 자리를 객관화시키도록 돕는 거예요. 근데 전두환이 지금처럼 회고록에 ‘발포명령 없었고 무차별한 살상은 없었다’고 한다든가, 육사 가서 사열을 한다든가 하면 피해자들은 다시 옛날 상황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래서 이분들의 치유에는 사회적인 지지와 공감, 진실규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가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는, 재해나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와 다른 특징이 있나요?

“국가폭력이라는 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줘야 할 국가가 가해자가 되는 거잖아요. 최후의 보루가 없어지는 거죠. 조작간첩이나 5·18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가 가해자가 되면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왜곡시켜서 2차적 트라우마가 훨씬 커요. 국가에 의한 낙인찍기로 사회적 매장을 당하니까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뭣보다도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과 불관용 원칙이 중요해요. 광주시민들이 집단발포로 죽었는데 총 쏜 놈은 없는 거예요. 용서를 해주려 해도 용서할 놈이 없네? 사람들은 늘 화해와 용서를 얘기하는데, 용서를 피해자한테 강요하면 안 돼요. 가해자가 사죄하는 것은 필연적 의무예요. 피해자가 그를 용서할지 말지 정하는 건 선택적 권리고요. 이래야만 지속가능한 화해가 되지요.”


-97년에 광주민주화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는데 왜 광주트라우마센터는 2012년에야 개소를 한 거죠?

“우리나라의 과거청산은 피해당사자의 고통이 빠진 과거청산입니다. 과거청산을 한다면서 기념관 짓고 기념비 세우고 하는데, 정작 희생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는 데는 소홀한 거죠.”


-늘 그래 왔죠. 위안부 할머니, 5·18, 세월호…. 단원고 졸업생들 만나서 강연도 하셨다면서요. 뭐라고 하셨어요?

“나도 그 애들도 ‘살아남은 자’잖아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도 너희들처럼 5·18 때 살아남은 사람이야. 근데 살아남은 니들이 있어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거야. 죄스러움을 가질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증언을 하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러니 어깨 펴고 살아가자’고요.”


상처 입은 이들이 다른 이의 상처를 보듬고 껴안는다. 슬픔의 연대가 힘이 된다. 강용주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그를 지원하는 해시태그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강용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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