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종림 스님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종림(72) 스님이 낙향해 책 박물관 겸 공부방 ‘고반재’(考般齋)를 연다. 불서 1100종, 한자 5400만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대장경 전산화’ 사업을 20년 만에 마무리하고 인생 2막을 시작하는 것이다. 고반재는 ‘군자가 고반재간에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시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란 악기를 두드리며 노는 ‘군자의 즐거움’쯤으로 풀이된다. 불교의 지혜인 반야를 생각하는 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고반재는 그의 고향 마을 인근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장자동 무위산 골짜기에 있다. 안의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제1회 아나키스트대회’가 열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천생 조직이나 이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나키스트’ 같은 종림 스님은 폼을 잡지도 않고, 누구를 차별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벗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 손꼽힌다. 그렇기에 고반재는 전시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와 시간을 잊은 대화를 통해 대자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고반재는 10명가량이 동시에 며칠 묵으며 공부모임을 할 수도 있다.
공부모임을 이끌 종림 스님은 애초부터 좌장 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한도 화도 없어 보인다. 수백 생 전부터 그랬던 것만 같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르며 부러지고 무너지며 겨우겨우 삶의 고개를 넘어가는 세인에게 부러운 품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님에게도 갈등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20대, 30대는 갈등 때문에 미래고 뭐고 다른 데를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무난한 삶을 살긴 했지만, ‘현실의 형편없는 나’와 ‘되고 싶은 나’와의 엄청난 괴리 때문에 괴로웠다고 했다. 그는 ‘나 같은 놈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단다.
그도 출가 이후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별짓을 다 해봤다. 마르크스와 헤겔, 토인비의 사상을 거쳐 주력(주문 외기), 정신집중, 장좌불와(일체 눕지 않고 하는 참선) 등 남들이 좋다고 하는 수행도 다 따라해봤다고 한다. “아무리 똑바로 서려고 해도, 도저히 설 수가 없었어. 발밑은 늘 경사지고 뒤틀려 있었지.”
발밑의 갈등 해결이 시급했기에 그는 도반들처럼 ‘이 뭐꼬’, ‘뜰 앞의 잣나무’ 같은 ‘남의 화두’를 들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선방에서도 치열하게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던 어느 날 그는 갈등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정신적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죽을 듯 살 듯 부여잡고 있었던 문제들이, 문제가 될 수 없고, 갈등을 일으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 응어리가 ‘해소’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었지.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길도 없었지. 해도 달도 없었어.” 정작 그런 상태에서 그는 마음의 갈등이 해소되고,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는 대찰인 전남 해남 대흥사 선원장을 지냈는데, 선방을 나와버렸다. 도반들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조실을 할 텐데”라며 붙잡았다. 하지만 더는 붙잡고 있을 것이 없으니,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전엔 붙잡고 있던 관념과 이념들이 부딪혀 바닥이 고르지 않았어. 그러니 바로 설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때부터 이제 어느 자리나 설 자신이 생겼어. 고른 자리면 고른 자리대로, 고르지 못한 자리면 그 자리대로 아무 데라도 나를 세울 수 있겠더라고. 애초에 좋아하던 곳이 아닌 자리에 서더라도 그때부터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지.”
그가 이 산골에서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공(空)의 자리에 서서 불경과 철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자신의 경험이나 고정관념이나 이념의 틀에서 보는 게 아니라 무에서 보겠다는 것이다.
“누구는 1의 관점에서, 누구는 2의 관점에서, 누구는 3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그렇게 한쪽에서밖에 못 보면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죽은 송장이지. 부분만 보는 것이지.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아니라 0에서 보면 저도 편해지고 세상도 편해져. 영에서 시작해 01, 02, 03식으로 보면 1번도 살고, 2번도 살고, 3번도 살 수 있어”
고반재엔 인도에서 용수의 중관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와 중관학당을 시작한 신상환 박사가 함께하고 있다. 중관도 유무의 대립을 초월한 ‘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이 절로 해소될 치유 공간, 고반재는 새달 3일 오후 2시 개원식을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772349.html#csidxf7feb681ff48c619ac19d4034d3e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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