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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진실한 것은 오직 고통뿐 - 신형철

by 오직~ 2016. 4. 22.
-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으며

 

 

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My life closed twice before its close)

= 에밀리 디킨슨

 

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그러나 두고 볼 일.
불멸이 나에게
세 번째 사건을 보여줄지는.

 

내게 닥친 두 번의 일들처럼
너무 거대하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절망적일지는.
이별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아는 모든 것.
그리고 지옥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크나큰 고통을 겪고 나면, 형식적인 감정들이 온다 (After great pain, a formal feeling comes)

= 에밀리 디킨슨

 

크나큰 고통을 겪고 나면, 형식적인 감정들이 온다.
신경은, 마치 무덤에서처럼, 의식(儀式)을 치르듯 가라앉고
뻣뻣한 심장은 묻는다. ‘견뎌낸 게 그인가요?
어제인가요 아니면 수천 년 전 일인가요?’

 

발은, 기계적으로, 돌고 돈다.
마치 나무인 양
굳어진 발길이
땅, 하늘, 혹은 그 어디로 향하건
돌덩어리 같은, 석영(石英)의 만족에 이른다.

 

이것은 납덩어리의 시간.
고통에서 살아남으면, 되돌아볼 테지.
얼어가는 사람이 눈을 생각하듯이.
처음에는 냉기, 다음에는 혼미, 그러고는 방기.

 

 

*“디킨슨 연구의 권위자인 성균관대 손혜숙 선생님께 이메일로 물어가며 시를 번역했다.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물론 오역과 오독은 모두 나의 것이다.”(신형철)

 

 

 

 

지난 2월18일에 작고한 일본의 소설가 쓰시마 유코(1947~2016)는 1980년대에 9살짜리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낸 후 쓴 ‘슬픔에 대하여’(한국어판 소설선집 <묵시>에 수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슬픔이란 스스로를 가여워하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스스로를 가여워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은 쉽게 슬퍼할 수도 없다.” 세상은 ‘자식 잃은 엄마’를 “슬픔의 상징”으로 생각하나, 정작 그녀는 충격과 분노, 무력감과 굴욕감 등에 시달리며 내내 울었을 뿐, 그런 감정과는 다른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구나. 그렇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만 이런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왜 학교에서는 ‘슬픔-학(學)’을 가르치지 않는가. 혼자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벽에 부딪친다. 예컨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뿐이다, 라는 벽.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딪친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진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영원히 공부해야 한다. 슬픔에 대한 나의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또 글을 쓴다.

 

미국 시사(詩史)에서 에드거 앨런 포와 월트 휘트먼 다음이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이다.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낸 뒤로 그녀는 평생을 은둔했다. 1700편이 넘는 시를 썼으나 그중 10편 정도를 제외하고는 발표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이 사람은 슬픔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슬픔의 어떤 깊은 곳까지 이 사람만은 걸어 들어갔구나 싶어진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다. 그게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오직 고통뿐이라는 것.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

 

그의 시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슬픔에 대한 자신감’이다. 슬픔에 대한 자신감이라니, 어쩌다 이런 것이 생기는가. 첫 번째 시로 맥락을 짐작해볼 수 있다. “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두 번의 결정적인 사건(누군가의 죽음)이 있었고, 그 사건이 디킨슨의 내면을 두 번 죽인 것이다.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그것도 두 번이나 죽은 사람, 그런 그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두고 볼 일이라고, 세 번째 죽음이 없으란 법 없으니. 이 시에서 “불멸”(immortality)은 슬픔을 공급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인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길 수 없는 불멸의 적수 앞에서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억지 미소를 짓는다.

 

인생에 맞서는 한 가지 방법은 가장 비관적인 아포리즘으로 그 인생을 요약하는 것이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그것이 이미 예상했던 것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그는 적었다. “이별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아는 모든 것. 그리고 지옥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이것은 세간의 기독교적 관념에 대한 도도한 반론이다. “천국”이라는 말은 그녀를 위로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은 단지 그 사람이 나를 떠난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기에. 그리고 “지옥”이 창조되기 위해서도 단테가 상상한 총 9개의 구역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뜨기만 하면 지금 여기가 지옥이므로.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시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크나큰 고통을 겪고 나면, 형식적인 감정들이 온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있지만 “형식적인”(formal) 것이 된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경이 무뎌지는 탓에 육체적 반응은 무덤에서 의식을 치르듯 느려진다. 심장은 뻣뻣해져서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견뎌낸 게 그인가요? 어제인가요 아니면 수천 년 전 일인가요?” 대문자로 표기된 ‘그’(He)를 예수로 읽는 해석들이 옳다면, 디킨슨은 예수의 고통과 자신의 그것을 헷갈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은 언제란 말인가.

 

2연은 그의 산책을 따라간다. “기계적인” 혹은 “나무인 양”과 같은 표현들이 그의 경로와 보폭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땅을 걷는지 하늘을 걷는지조차 모른다. 놀라운 것은 이 산책의 끝에 “석영의 만족”(quartz contentment)이 있다는 것이다. 결정화되면 수정(水晶)이 되는 광물이 석영(石英)이다. 이 아픈 시간 속에 어째서 광물과도 같은 만족인가.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나는 반어로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지옥에 익숙해져 절규도 통곡도 잊은, 그 기묘한 평정 상태, 그래서 이 생에 아무런 불만도 없어 보이는 “돌덩어리” 같은 한 사람. 그래서 그는 만족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거대한 고통이 그를 관통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살아가는(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존재가 고통이 남긴 흉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새살이 돋은 곳에는 감각이 없는 법이고, 그래서 새살은 자신에게 아무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그가 이제는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됐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무신경함은 폭력적이다. 지옥에 익숙해지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디킨슨에 따르면 그것은 눈밭 위에서 죽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냉기”(chill)를 느끼다가, “혼미”(stupor)를 경험하고, 마침내 “방기”(letting go)해 버리는 것. 이러고서도 살 수 있는가? 그랬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다른 시에서 디킨슨은 “영혼은 그 자신의 사회를 선택한다, 그러고는 문을 닫아버린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어떻게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내가 한 사람의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니리.” 이렇게 말해놓고 왜 자기의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았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견뎌낸 사람, 그런 사람만이 밟을 수 있는 장소가 시의 영토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가장 처절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이상하리만치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의 시가 내 앞에 있으므로.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399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