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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화마(火魔)를 잡기 위한 맞불 - 신형철

by 오직~ 2016. 3. 8.

생에 대한 각서     이성복

 

사람 한평생에 칠십 종이 넘는 벌레와 열 마리 이상의 거미를 삼킨다 한다 나도 떨고 있는 별 하나를 뱃속에 삼켰다 남들이 보면 부리 긴 새가 겁에 질린 무당벌레를 삼켰다 하리라 목 없는 무당개구리를 초록 물뱀이 삼켰다 하리라 하지만 나는 생쥐같이 노란 어떤 것이 숙변의 뱃속에서 횟배를 앓게 한다 하리라 여러 날 굶은 생쥐가 미끄러운 짬밥통 속에서 엉덩방아 찧다가 끝내 날개를 얻었다 하리라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자신을 찾아온 후배 시인 이우성에게 이성복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작가를 스승으로 택한다는 건 배우자를 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극지의 시> 139~140쪽) 글을 웬만큼 써서 나름의 요령이 생기면 스승의 자리가 슬그머니 없어진다. ‘스승께서 이 글을 보면 뭐라 하실까?’ 이렇게 자문하게 만드는 ‘글쓰기의 초자아’가 잊힌다는 것이다. 어디 글 쓰는 사람만의 일일까. 자신감이 좀 붙으면, 예전에 두려워하던 이가 귀찮아지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무렵이 가장 바쁜 때다. 그러나 그것은 잘되고 있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만 그것을 모른다.

 

내 안에 스승을 두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는 이성복 시인에게 배웠다. “어른이 없으면 자기가 어른일까요. 아닙니다. 어른이 없는 것, 그것이 어린애지요.”(<끝나지 않는 대화> 226쪽) 폐가 될까 두려워 그의 제자를 자처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스승의 자리가 흐릿해질 때마다 나는 그의 문장을 떨며 읽는다. “글쓰기는 나를 파괴하는 거예요. 칼끝을 자기에게 닿게 하세요. (…) 피 안 흘리면서, 흘리는 것처럼 사기 치는 걸 독자는 제일 싫어해요.”(<불화하는 말들> 114~115쪽) 그의 최근 책 여섯 권은 괴롭다. 어디를 펼쳐도 ‘너는 가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경(經)이라고 할까. 읽으면 비참해지지만 안 읽으면 비천해진다.

 

그래서 그의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도 다시 시도해보려 한다. 다시, 라고 말한 것은 3년 전 이맘때 어느 지면에 이 시를 소개한 적이 있어서다(<한겨레21> 950호). 인용만 해놓고는 아득하여서 놓아버렸다. “좋은 시의 요체는 비(非)시적인 혹은 반(反)시적인 일상사의 급소를 급습해서 매몰된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조하는 것이다.”(<고백의 형식들> 167쪽) 그런 시인데, 이 시가 뚫고 들어가 있는 곳까지 따라 들어갈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여섯 개의 문장을 두 개씩 묶으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렇게 끊어 읽으면 이번에는 보일까. 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① “사람 한평생에 칠십 종이 넘는 벌레와 열 마리 이상의 거미를 삼킨다 한다. 나도 떨고 있는 별 하나를 뱃속에 삼켰다.” 시인도 처음 알았을 때 놀랐으리라. 자는 동안 입속으로 벌레나 거미 따위가 들어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저렇게나 많이 삼키는지 몰랐으므로 나 역시 이 구절에 놀라고 말았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바로 이런 것이 생의 실상 중 하나일 것이다. 실상과 대면하기 전에는 모른다. 우리가 눈뜨고 경험하는 세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내가 먹은 세끼 음식이 물질적으로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깨끗하고 고운 것만 먹으며 살고 있다는 그 믿음이 환상이라는 뜻이다.

 

첫 문장을 읽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인간은 먹는 존재다. 깨어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자는 동안에도 먹는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다 알지 못한다. 나는 대체 무엇을 먹으며 살아온 것인가. 여기서 시인이 말한다. 자신은 “떨고 있는 별 하나”를 삼킨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이 이미지를 풀기는 쉽지 않지만 ‘별’의 상징적·관례적 의미를 챙기고 그 별이 ‘떨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어쩌면 지금 시인은 자신의 생이 어떤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 헌신하는 삶이 될 것이라 믿었던 그때를 회고하는 것일까. 감히 내가 추구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고귀했으므로 그 별이 떠는 것처럼 보였을까.

 

② “남들이 보면 부리 긴 새가 겁에 질린 무당벌레를 삼켰다 하리라. 목 없는 무당개구리를 초록 물뱀이 삼켰다 하리라.” 그러나 별을 삼켰다 믿은 삶은 나보다 약한 짐승을 삼키며 살아온 삶에 불과한 것이었다. “떨고 있는 별”이 “겁에 질린 무당벌레”와 “목 없는 무당개구리”로 바뀌어 있다. 가치 추구의 삶이 아니라 단순 생존의 삶이었다는 것. (인간이 육식동물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비통한 일이다.) “남들이 보면”이라는 말은, 남들이 나를 오해했다는 항변이라기보다 남들이 본 그대로가 진실이라는 착잡한 인정일 것이다. 다음의 “하지만”은 앞말을 엎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서 보충한다.

 

③ “하지만 나는 생쥐같이 노란 어떤 것이 숙변의 뱃속에서 횟배를 앓게 한다 하리라. 여러 날 굶은 생쥐가 미끄러운 짬밥통 속에서 엉덩방아를 찧다가 끝내 날개를 얻었다 하리라.” 남들이 본 것이 정직한 진실이기는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내가 추구한 가치가 내가 삼킨 먹이에 불과하더라도 그것들로 인해 나는 횟배 앓듯 내내 아프지 않은가. 게다가 나의 장(臟) 어디쯤에선가 내내 미끄러지고 있는 저 생쥐는 그곳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 두 문장이 덧붙인 것은 항구적인 고통과 초월에의 노력이 생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날개’를 얻었다니. 언제 또 어떻게?

 

결국 우리는 미끄러운 짬밥통 속에서 허덕이다가 죽음과 더불어 놓여난다는 뜻일까. 비관적이다. 사실 이성복은 내내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고 허무에 빠지거나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은 없다. 그의 비관주의는 평론가 김현이 명명한 대로 ‘따뜻한 비관주의’다. 여기서 따뜻하다는 것은 달콤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약하지 않다는 뜻이어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약점을 옮기고 다니면 내가 약하다는 증거예요.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줘야 그 사람을 싫어할 자격이 있어요.”(<무한화서> 178쪽) 바로 이것이다. 생을 싫어할 자격이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여운이 따뜻한 것이다.

 

실은 같은 의문을 시인도 그의 스승 카프카에게 품었었다. 카프카의 문학은 비관적인데 어째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가 하고. 시인의 답은 이렇다. 카프카의 문학은 “인생이라는 화마(火魔)를 잡기 위한 맞불”(<극지의 시> 85쪽)이라는 것.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 놓는 불이 맞불이거니와,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같은 책 84쪽)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334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