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 황동규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00㏄ 1병,
짐빔(Jeam Beam) 반 병,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 볼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聖畵)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3)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홀로움’을 짐작해 보기
지난 1월21일에 황동규 시인을 뵈어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내용을 정리해 매체에 보냈다. 글을 쓸 때는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이 뒤늦게 떠올라 여기에 적는다. 그날 대담이 끝나갈 무렵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선생님은 외로우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물론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고 시인은 덧붙였다. “외로움이 두렵지는 않아요. 내가 외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외로워 죽겠다’가 아니라 그냥 ‘외롭다’라는 사실을 뜻할 뿐입니다. 내 외로움은 가볍습니다.” 이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더 캐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자 묻고 있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한 인간의 육체를 지탱하는 것이 밥이라면 정신을 북돋우는 것은 인정(認定)이다. 서구의 석학들이 한 말인데 기꺼이 동의하는 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우리를 평생 놓아주지 않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이고, 그 물음은 깊은 곳에서 ‘나는 네가 욕망할(인정할) 만한 사람인가?’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삶은 지독히 ‘외로운 사업’이 되고 만다. 우리가 최소한의 인정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직업을 택하고 가족을 이루는 심층 동기가 거기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정 욕망이 오래 충족되지 않을 때 그것은 다른 통로로 폭발한다. 타인들에게 버려졌다는 느낌은 타인을 향한 공격성으로 전환될 수 있다. 온라인 공간에 자욱한, 공인들에 대한 저 지독한 조롱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는데 한 번 더 적고 싶다. 누군가를 조롱할 때 당신은 그 누군가에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패배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외로움’은 고통이고 위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찬미하는 ‘고독’과는 얼마나 다른가.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위대한 일은 한결같이 시장터와 명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Ι-12) 그렇다면 차라리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을 분리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한나 아렌트처럼 말이다. “고독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있는, ‘홀로’이다. 그러므로 하나-속의-둘(two-in-one)이다.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모든 타인들에 의해 버려진, 그야말로 하나(one)다.”(<전체주의의 기원>) 요컨대 고독은 나를 둘로 나누어 대화하게 만든다는 것.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어려운 문장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개별화’되려면 ‘고독화’(라는 이상한 말로 옮길 수밖에 없다)를 겪어야 한다는 것. “개별화,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아를 완강하게 주장하여 그가 세계라 여기는 바로 이런저런 것에다 자신을 펼쳐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화란, 오히려 개개의 인간이 그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것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즉 세계의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독화이다.”(<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2절) 고독 속에서만 “처음으로” 사물과 세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것.
한편 알랭 바디우는 기존의 지식과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고 그 ‘진리’에 관통당한 자가 그것에 충실하기를 고집하면 고독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는 페이지에서 백상현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을 덧붙였다. “누구도 금지된 사랑에 매달린 두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도청을 사수했던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갈릴레이의 미친 지동설을 믿지 않는다. 귀를 자른 화가의 작품을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 속의 그들은 당신들의 평범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에.”(백상현, <고독의 매뉴얼>, 116쪽)
보다시피 철학자들은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이토록 예민하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내 보기에 황동규는 외로움이 더는 외로움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가장 섬세하게 포착하는 시인들 중 하나다. 그는 1997년 버클리대학에 반년 동안 방문교수로 가서는 차가 없어 거의 방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할 때 일생일대의 끔찍한 외로움을 경험했다. “무언가를 찾으러 장롱 밑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삶의 향기 몇 점>, 39쪽)에 비유될 만한 그 외로움을 그는 어떤 계기로 문득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시인은 그때를 ‘외로움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때의 외로움은 더 이상 외로움이라고 불리는 그 감정이 아닌데, 그것은 철학자들이 고독이라 부르는 것과도 또 달라서, 그는 새로운 말까지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홀로움’이다. 이 말 앞에서 나는 애가 탄다. 이것은 어떤 상태일까? 시인의 속 시원한 설명은 없고 홀로움에 대한 시만 여럿인데, 그중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얼마 전 돌아가신 선친의 유산은 술과 옷가지가 전부다. 빈집에서 그 아버지의 옷들을 걸쳐 입고 베란다에 쪼그려 앉은 아들이 있다. 그는 지금 외로울까. 그럴 것이다. 그런 그가 실란(蘭) 줄기를 기어오르는 개미를 보고 있다.
개미는 위태로운 등반 끝에 드디어 꽃에 도착한다. 그다음은? 더는 할 일이 없어 그만 쪼그리고 앉아 버렸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아들이 그러고 있었듯이. 그때 무슨 깨달음처럼 베란다 전체가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추억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착이 빚은 일종의 정지 상태라는 것. 그 추억에서 이제는 내려와야 할 때가 되었다. 개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아버지를 비로소 떠나보냈고, 외로움은 환해져 홀로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해 보는 것이지만 나는 아직도 홀로움을 다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리라.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312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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