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식

동무론 (Chapter6~Chapter20)

by 오직~ 2015. 11. 10.

 

공동체든 체계든, 결정(決定)이든 증상이든, 정리(情理)든 합리든, 그 실천이 현실적으로 결절하면서 내려앉는 지점은 모두 인간관계라는 그 사소함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의 사소함에 대한 현명한 대응의 양식 속에 자리하지 않던가?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그 속절없는 무능 속에 세속의 본질은 옹글게 똬리를 틀고 있다.

척마(尺魔)가 세속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을 안이하고 온건하게 포획하는 촌선(寸善), 그 촌선의 벽이 세속의 본질이다.

어리석은 촌선으로 짠 지옥, 바로 그것이 세속이며 세세토록 유전되는 척마인 것이다.

 

 

신뢰는 냉혹하고 적절하게, 호감의 풍선을 찢고 호의의 거울을 깨뜨린다. 그리고 시행착오와 상처를 딛고 타자성의 아득한 지평으로 나아간다. 시나브로, 위험하게, 부사적으로 몸을 끄-을-며 나아간다.

 

 

타자를 만나는 일은, 내 자아의 내면적 풍경을 장식하던 이미지들과 개념들이 그 변증법적 예각(銳角)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텍스트를 내부에서 변주하는 문변(文辯)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사랑의 감동은 없다. 감동의 그 완벽한 부재를 응연히 바라보고 극진하게 응대하는 역설의 생산성, 그것만이 (없는) 사랑의 흔적이며 그 감동일 뿐이다. 내 모든 호의와 의도가 하얗게 질리는 그 부재의 지평, 그 심리적 영도(零度), 그 영원히 낯설 부끄러움 속을 함께 걷는 것. 사랑은 그 짧은 환상이며 그 환상의 비용으로 얻은 더 짧은 세속 속의 구원이다.

 

 

 

해의 부름과 시선을 한 몸에 얻는다는 착각의 삶, 그 완벽한 오인의 행복 (해바라기 콤플렉스)

 

삶은 오염과 흠결에 다름 아니며 이런저런 종류의 정화의식(淨化儀式)을 주기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역설적인 동력을 얻는 체계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그 모든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처럼 삶의 시작은 곧 위반이며 상처다. 해바라기 콤플렉스란 삶을 체계적으로 되-풀이 하게 만드는 그 원초적 오염과 흠결, 위반과 상처를 외면한 채 반(反)초월론적으로 가꾸는 거울방 속의 광학적 행복을 가리키는것이다.

 

커츠는 "흘끗 엿보인 진실의 그 끔찍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암흑 속에 누워서 그 어둠의 핵심을 투탈(透脫)한 자만이 견딜 수 있는 표정이다. 정신분석의 지혜가 반복해서 일러두듯이 필경 삶은 앎이 아니라 견딤의 물음인 것이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연(深淵)은 그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거꾸로 들여다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상(症狀)으로 타협할 수도 없는 야생(野生)의 도착 그 자체인 실재를 견디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이 인간과 싸우는 최초이자 최후의 전투인 것이다.

 

 

 

인생이야 워낙 어리석음의 도가니이고 또 그것 자체로 스캔들이지만, 산책은 그중에서도 빼어난 현명함이다. 그 현명함은 우선 '의도의 바깥'으로 외출하는 여유, 그리고 그로 인한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공원(空圓)으로서의 공원(公園)의 뜻은 '이성의 빛'에서 물러나와 '존재의 빈터'를 체험하는 시공간의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24시간 의도와 결심, 욕망과 보람 속에서 아옹다옹 영위하는 이 자본제적 일상은 내 존재의 흩어짐과 비움을 쉼없이 유예하고 저지함으로써 그 의사(擬似) 필연성의 신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산(散)책의 그 흩어짐 속에서야, 우리 일상의 흩어지지 않는, 아니 흩어질 수 없는 그 틀은 비로소 낯설게 되새김질된다. 그 산책의 빈터속에서야 소유와 욕망의 나르시시즘은 어리석고 슬픈 과거처럼 기억되기 시작한다.

 

 

 

"내가 이기적으로 내 삶의 내부에서만 걷기로 한다면,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아무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 그 내부를 거닐다가 길을 잃게 만드는 미로다." "이기주의는 미로와 같다."

 

 

 

내내 자아의 의도를 벗어나는 쓸쓸한 인생살이의 미로 속에서 누구나 그만한 허영과 과시에 빠질 권리는 있지 않겠는갸?

 

 

 

'거울로 인해 확장된 자아는 그 자신의 지각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그(마샬 맥루한)의 설명에 의하면 이 마비 현상은 매체의 편재성이라는 환경속에서 정보의 과잉에 시달리는 근현대인들의 자기방어기제와 같은 것이다. 즉 마비는 매체와 정보의 과도한 부하(負荷)로부터 중추신경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셈인데, 이것은 기계 문명 일반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딜레마, 그 자가당착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하자면 인간은 기계라는 덫에 물린 채 함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간(間), 그것은 마치 '문틈을 치며 번득거리는 햇살'처럼, 시간이라는 숙명적인 틈에 끼인 불구(!)의 몸인 채로 그 인문(人紋)을 조형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불안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인간이 처한 내재적 계기다. "불안은 현존재로 하여금... 언제나 이미 그 자신으로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과 함께 현존재는 가장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의 앞에 선다."

 

 

조문객들은 '아직은 아니'라는 위안속에서 타인의 죽음과 더불어 찾아온 잠시의 성찰적 불안을 뒤로 한 채 다시 세속의, 욕망의, 자본주의적 무시간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간다.

 

 

 

개인의 진실은 삶의 일관된 양식의 '충실성'으로써 증명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완벽한 진리란 결국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의욕'은 욕심과 금욕의 사이를 지르되지만 지며리 나아가는 오래된 삶의 지혜다.

 

 

기실 사랑(에로티즘)과 종교, 예술과 문화 일반은 모두 사치의 형식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욕망을 '기질'이라고도 했지만, 철학과 인문학, 종교와 예술적 주체속에는 또 그 얼마나 도저한 사치의 기질을 품고 있는가?

 

 

 

기업-체계속의 정해진 노동량을 채우고 귀가한 k가 촛불이 은은한 화장실의 욕조속에 몸을 담근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체계의 밖으로 정서적 '산책'을 나선다면 그것은 사적 종교의 형식을 갖춘 자기-애도가 아니고 무엇일까?

기형도의 그 유명한 말처럼 "사랑을 잃고 (시를) 쓴다"면 그 시-쓰기야말로 자기애도와 치유의 가장 오래된 인문의 양식이 아니고 무엇일까?

혹은 백자(白磁)의 흰빛속에서 연녹색 찻잎이 풀어지는 탬포로 당신의 마음조차 풀어지는 시공간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루분의 존재의 감가상각을 애도하는 가장 탁월한 형식이 아닐까?

 

 

 

 

 

☆ 동무론 (2010) 초판 2008

    - 김영민 / 한겨레출판

 

 

 

 

 

대부분... 활자를 보았다!

이해한들 철학자가 의도한 의도의 흐릿한 그림자의 발뒤꿈치에나 다다랐을까

그렇지만 때로는 알아듣는 듯 알은 채를 하며

시를 읽듯 읽었다!

 

쉬엄 쉬어갈 수 밖에 없었고

앞 쪽으로 거슬러 오르길 여러번

그래봤자 몽매한 눈빛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작은 언덕 몇 고개를 오른 듯

숨을 고르며 읽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 했으나

책은 절판되었다.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인자의 기억법  (0) 2015.11.13
골든 슬럼버  (0) 2015.11.12
동무론 (Chapter1~Chapter5)  (0) 2015.11.10
인물과 사상 2015. 10  (0) 2015.10.31
무의미의 축제  (0) 201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