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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동무론 (Chapter1~Chapter5)

by 오직~ 2015. 11. 10.

무능과 부재의 인문적 급진성만으로 가능한 '지는 싸움'은 걷다가 죽는 것인데

기꺼이 걷다가 죽으려는 동무들에게 이 책이 작은 위안과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처는 예감되지만, 그 상처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깨달은 것을 밝은 길 위에서 놓치듯 말이다. 구조와 패턴의 인과성은 환하게 보이더라도 개인의 이치를 설명하는 인과율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 개인은 영원히 어리석다.

 

 

네 일상은, 네 공부는 그저 낡은 의도를 팔아서 새로운 의도를 구입하는 환상적 의도의 잉여가치설일 뿐이다. 기억의 잉여가 문명이라면 네 공부는 한갓 의도의 잉여가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공부하고 사랑하는 이들이여, 진지하고 성실하게 의도하여라. 네 꽁지 뒤로 상처와 어리석음이 는개처럼 피어오르리라.

 

 

과연 실천이 의도를 배반하지 않고, 몸이 관념을 먹어치우지 않는 정신문화를 생산해낼 수 있을까?

 

 

몸이 의도를 배반하듯이 신뢰는 자주 호의를 비껴간다.

 

대개의 어리석음은 어떤 종류의 '반복'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은 그 성격이 형식적이다. 형식을 이루지 못하는 실수는 반복되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현명함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 자체로 형식을 이루지 않도록 민활하게 애쓸 일이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그 형식이 굳어져서 웃음을 유발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오직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호의를 버릇이나 유형 속에 저장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이 길게 보아 유익하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적 호의'와 '사회적 신뢰'를 혼동하면서 사는 것이다.

 

의도가 몸을 비껴가고 호의가 신뢰에 이르지 못하고, 우연이 인생을 지배하고 선의가 지옥을 만드는 것, '세속'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원적 이기심 속에서 늘 잊고 있는 사실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심연을 건너가듯 조심스럽고 지속적으로 몸을 끄-을-고 나아가며 배워야 하는 것이다.

 

 

공적인 합리를 사적 정리(情理)로 얼버무리는 정실주의나, 사적인 정리를 공적 합리의 격자 속에 포획하고 전유하려는 관료주의나 권위주의는 모두 우리 일상적 진보와 성숙의 중요한 장애물이다.

 

 

설거지용 고무장갑을 사러 갔다가 고무장갑은 사지 않고 마침 그 곁에 전시된 봉걸레 하나를 사왔다. 그것이 세속의 본질이며 어긋남과 실수를 사물의 질서 속에 새겨 넣을 수 밖에 없는 쿤데라적 인생이다. 고무장갑과 봉걸레의 어느 측면이 닮았거나 말았거나 둘 사이를 갈라놓은 틈이 어떠하거나! 소개받은 여자보다 문득 거간으로 나온 여자에게 더 마음이 쏠리지 않던가? 거간과 타깃이 그 무슨 관계로 얽혔든지 그들을 한데 모으는 내 연상(聯想)이 길든지 짧든지 곧 그것이 우리의 세속이며 또 우리의 인생.

 

은유는 닮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징후인데 우리네 세속의 본질에 의하면 깊은 것도 슬픈 일이요, 닮은 것도 결국 그 나름대로 슬픈 노릇이기 때문이다.

 

은유라는 깊이와 환유라는 넓이가 교합헤서 만든 세속의 이치는 호의와 결심을, 사랑과 신뢰를 그 바탕에서 허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그 넓이가 그리 넓지 않다는 점이며 그 깊이도 그리 깊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깊지 않은 깊이와 넓지 않는 넓이 사이를 어린아이처럼 걷는다. 세속은 이처럼 명랑한 채로 슬프다. 정돈된 채로 어긋난다.

 

 

"매일 하루 분량의 나를 창조한다."   사르트르

 

 

물론 말은 무엇보다도 행위이자 사건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이자 유일한 삶의 가면-우리의 삶이 바로 그 가면을 가리키면서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가면-이다. 가면이기에, 우연이기에, 토대 없는 유희의 마당이기에, 그리고 은유와 환유의 즉흥성이기에 말은 더욱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것이며, 신뢰는 바로 그 한없는 조심스러움으로 엮어내는 허공의 집인 것이다.

 

 

세속의 본질은 그 곳에 본질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의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 때문이 아니다. 슬픔은 분노와 일치하지 않고 분노의 긴 잔상(殘像)보다 더 길게 희미해지는 끝에서야 슬픔이 돌아본다. 슬픔은 적들의 횡포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무들의 선의와 연인들의 호의에 얹혀 생긴다.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그 속절없는 무능 속에 세속의 본질은 옹글게 똬리를 틀고 있다.

 

척마(尺魔)가 세속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촌선(寸善)이 그 본질이며 촌선이라는 그 적음을 추스르는 데 늘 실패한다는 사실 속에 세속의 본질이 있다.

척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오히려 명료하고 단호할 수 있다. 그러나 촌선을 대접하는 우리의 일상은 늘 주춤거리고 어긋나며 못미치는데, 실은 바로 그 속에 세속의 본질이 희미한 미소를 숨기고 있다. 촌선척마(寸善尺魔)라는 객관성 속에 세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척마와 싸우던 그 의기(意氣)가 촌선을 앞두고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데 그 세속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되는 그 원환(圓環)의 헤덤빔(迷妄) 속에 세속의 본질이 있다. 세속은 그처럼 한 치 앞을 짚을 수 없는 헤덤빔 속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장소다. 그러므로 세속 속의 최선은 오직 다시 시작하는 것, 다시 걷는 것뿐이다. 최선의 단자(Monad)가 되어 이 세속의 공간을 떠돌면서 그 단자에 틈이 생기는 어느 빛나는 시간에 희망의 줄을 잇고 있을 뿐이다. 의도도 믿음도 호의도 다짐도 아니다. 언덕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바람이 문제다.

 

 

내가 말하는 약속이란 곧 '정과 함께 정을 넘어가기'로서의 '알면서 모른 체하기'를 가리킨다. 시시때때로 정리(情理)는 세속의 경위(經緯)를 엮는 은유와 환유의 그 주술적 전염과 범람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아는 체하라고 젖먹이처럼 보챈다. 그 정리의 천국, 그 호의의 지옥 속에서 공사의 세쇄(細瑣)한 준별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불가능하기에 역설적으로 약속이 필요한 것이다. 해석의 무한성, 그 기표와 심리의 파쇄(破碎) 아래로 꼬리를 감추는 그 영악한 비(非)-자아를 나무라는 약속!

 

현명한 실천적 규제가 없으면, 알면서 모른 체하기의 인문적 성숙이 개시(開示)한 서늘한 행방(行方)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지식은 다람쥐 쳇바퀴짓을 계속하며 그 거울/자아의 내부만을 끝없이 닦는다. 요컨대 약속은 자아의 늪을 지나가려는 수행성이다.

 

 

비코에 따르면, 인간 지성에 의한 분명한 인식은 마치 램프의 조명 아래에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인식 자체가 사물의 주변을 몰아낸다. 신의 경계 없는 통전적(通全的) 지성에 비해 인간의 지성은 단지 경계짓기의 수동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인식은 일종의 구별과 차별이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에고의 에너지가 제한된 구역에 투여(cathexis)되는 사건이다. (지식은 지식을 구원할 수 없다)

 

 

 

세속은 무엇보다도 슬픈 것인데 그것은 내가 내 진실을 알 수 없게끔 구성된 바로 내 자신의 성채(城砦)와 직면하는 경험이기 때문이지요.

 

세속은, 실천이 의도를 배신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로써 실천을 감싸보려고 하는 '그림자 던지기'와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알다시피 그림자는 던질 수가 없는데, 그것을 던지려는 바로 그 사람이 스스로 아니라고 오인하는 그 그림자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바로 그것이 현명함이지요. 그러나 세속은 그것의 만성적 불가능성으로 구성된 나태한 미만(彌滿)과 그 슬픔이랍니다.

 

세속은, 호의가 그로테스크하게, 코믹하게, 때로는 참석(慘惜)하게, 신뢰의 문 앞에서 자빠지는 꼴 속에서 그 화색(禍色)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호의를 향한 슬픔과 신뢰를 향한 아픔이 교차하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 사건이 총체적 무지 속에서 반복되는 조건/한계 속의 바로 그 사건의 밝은 아우라가 세속이지요.

 

세속은 '만날 수 없음'의 표상입니다.

스치고 섞이면서 만날 수 없고, 겹치고 묶이면서 만날 수 없고, 손을 잡고 혼인하면서 만날 수 없고, 악수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어긋남의 표상. 내 속에 있으면서도, 아니,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아득한 거리에 대한 표상.

 

세속은 반복입니다. 그것은 반복을 피하려는 의도 그 자체가 반복의 구조에 복무하는 역설적 되먹임을 쓸쓸하게 회고하는 짓입니다. 반복을 피한다고 했지만 실은 우리 모두는 그 반복에 '붙들려' 있을 뿐입니다. 피하려는 동작으로 인해 거꾸로 그 반복을 재촉하는 강박이 우리의 존재방식(Seinsweise)이 되어가고 있지요. 세속은 반복인데, 더 서글픈 노릇은 그 반복의 발원지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조건과 한계 사이의 어느 길목을 오늘도 반복은 쓸쓸하고 엄연하게 가로지르고 있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아의 바로 그 몸부림으로 짜인 어리석음만이 세속의 동력이랍니다. 아, 그렇게 인생은 한바탕의 유쾌한 어리석음이라지요!

어리석음이란 정신의 '굳은살'과 같은 것인데, 굳은 부분을 없애면 살도 없어질 뿐 아니라 '아아, 어리석게도' 속살의 전부는 바로 그 굳은살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인문적 실천과 그 실천이 연대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정투쟁과 냉소의 악순환, 그 진지한 불모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냉소는 해결(solution)도, 해체도, 해소(dis-solution)도 아니다.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뒤집힌 허영과 모방욕망이거나 허무에 체한 탓으로 생기는 트림이거나 정신적 무기력을 무기력의 정신으로 손쉽게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허영의 균열음에 불과한 그 냉소..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불과..

불모적 자조..

 

진지한 공부는 그 단계와 내용에 상관없이 대체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충일한 세계인 법이어서 냉소가 틈입하기 어렵다.

 

 

사람이 '사람(史覽)', 즉 '역사를 보는 존재'라고 하거나 인간이 곧 '사이존재(Zwischen-wesen)'라고 하듯이 자신의 내면에 골몰할수록 오히려 그 존재의 이유(raison d'etre)는 실종된다. 키르케고르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일종일 뿐이다. 똑똑한 피폐의 공전 속에서 자의식은 발광(發光), 이윽고 발광(發狂)의 징후까지 보이고 마치 굳은 살처럼 속으로 파고들어 세상에 대한 냉소와 자기피폐의 기운은 '자기파괴의 미학적 충동'(벤야민)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게 마련이다.

 

'내면에의 골몰'을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 즉 "명석하면서도 명랑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정리가 합리를 갉아먹고, 사감(私感)이 공의(公議)를 훼손시키고, 선사(先私)에 후공(後公)하고, 당동(黨同)으로 벌이(伐異)하고, 동지(同志)의 견강으로 동무(同無)의 유연을 꺾고, 자폐의 경화(cirrhosis) 위에 체제의 기치를 꽂는 것이 우리의 사귐이 될 수 없으며, 그 새로운 실천이 터전이 될 수 없다.

 

동무의 한 축은 말 그대로 "같은 것[同]이 없는[無]"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임계와 경계와 한계를 걷는 삶과 더불어 위험한, 서늘한 관계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동무를 사귀는 일은 그 위험한, 없는, 미래적인 존재양식에 나를 견주며 겹치는 일이며 그래서 나를(즉, 내 관계를) 재조정하고 재구성하는 계속적인 과정, 그 끝없는 '고쳐말하기', '고쳐던지기[再投棄]', 그 섭동(攝動)의 실존적 조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같은 관습에 몸을 의탁하는 짓으로써 상식과 도덕의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 관계, 이념과 진보를 빌미로 같은 언어와 사정(私情) 아래 결집하지 않는 관계를 뜻한다.

 

동무는 체계와의 창의적인 불화를 통해 '위험한 삶'을 일상화하고, 그 위험이 유혹하는 전염의 자장 속, 그 열린 동무의 지평 앞으로 나를 호출해서 내 삶의 양식을 그 근간에서 뒤흔들어보는 재조합, 재구성의 실험이며, 해체와 갱생의 경험이다. 그래서 동무로서의 나는 끝없이 '넘어가는 존재', '전염시키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표준화한 위성(衛星)들을, 그들의 백귀야행(百鬼夜行)하는 인정투쟁과 냉소와 가족주의를 '섭동시키는 존재'로 부름받는다.

 

 

"네 적들을 '충실하게' 미워하고, 네 동무들을 네 시간처럼 대접하라."

 

 

 

원칙과 이념만으로는 영영 건질 수 없는 실천의 골과 마루, 그 틈과 구멍 속에서 지향하고 유지해야 할 현명함은 법제화된 평등과 자유의 기억이나 그 메아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독한 의도와 결심이 아닌 사회적 행위 속의 근기와 슬기이자 온기와 용기이고, 양보와 배려이자 선도(先導)와 희생과 같은 것으로서, 잠시도 쉴 수 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현명한 복종-지배'의 징검다리들인 것이다.

 

자유는 무응답의 이기심이고 평등은 주장의 이기심일 뿐인 세속. 베버의 말처럼 '정신 없는 전문가와 마음 없는 향락가'들로 북적대는 세속에서 다시 복종과 지배를 들먹이는 짓은 열없는 시대착오일 뿐 아니라 영락없는 스캔들로 보인다. 그러나 연대가 다만 합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관계와 주변을 바꾸려는 실천의 직물(織物)이라면, 근기와 온기와 용기와 슬기를 북돋우는 실천적 현명, 현명한 실천이 요체다. 그리고 그 실천은 현명한 복종과 지배의 윤번제(輪番制), 우리 일상의 자잘한 일들 속으로 어울려 개입하는 나섬과 물러섬, 나눔과 누림, 희생과 배려, 앞섬과 처짐, 그리소 손을 빌리고 빌려줌 속에서 가능해진다.

 

 

 

 

☆ 동무론 (2010) 초판 2008

    - 김영민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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