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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지정학: 건널목에서 알박이로 - 김병익

by 오직~ 2014. 8. 2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2191.html

 

 

 

 

 

지난여름 마른장마의 더위를 식혀준 건 정민 교수의 두터운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었다. 한해의 연구년을 하버드대학 연경학회 도서관에 파묻혀 ‘후지쓰카 컬렉션’을 탐사한 연구 과정을 보고한 이 책을 나는 지식사회사의 논픽션 추리물처럼 흥미롭게 본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는 한국과 중국의 좋은 한적들을 꽤 많이 수집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일본의 패전 후 미국 연경학회로 흘러들어갔다. 후지쓰카는 손재형의 간청에 못 이겨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추사의 <세한도>를 돈 받지 않고 그냥 돌려주었고 그의 아들 아키나오(明直)도 몇해 전 아버지의 소장품 중 추사 관련의 것들을 과천의 연구소에 200만엔의 연구비를 보태 무상 기증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한 이 미담이 더욱 의미 깊었던 것은 그들이 수집한 도서들이 조선조의 북학파와 실학파 연구의 소중한 자료들이며 우리나라에도 없거나 모르던 책이 많았다는 점이다.

 

정민 교수가 이 작업에서 흥분에 젖어 열정적으로 찾고 적고 고증하며 연구한 것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반의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김정희에 이르는 조선의 진보적 선비들이 연행 사절단에 끼어 간 북경에서 중국의 학자 예술가들과 필담으로 대화, 토론하고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눈 기록과 저작들이었다. 중원의 학자들은 변방이지만 ‘소중화’로 자부해온 조선 지식인들과 의견을 나누고 작품과 선물을 교환하며 진정 서로를 존중했다. 동호인들은 서로의 글을 베껴 연구하고 시와 그림에 상호 비평을 달아가며 우의를 두터이했고 그들의 부음을 들으면 뒤늦게나마 상례를 치를 정도로 경의를 표했다. 서로의 소식과 서간은 우편 제도가 없어 연행사를 통해 전달되어야 했기에 몇년, 빨라야 열달 넘게 걸렸지만, 그들의 편지와 만나서 나눈 한문 필담들은 책자로 묶여 귀중한 자료문건이 될 수 있었다. 한·중 간의 이 학문적 교류를 보고한 정민 교수는 두 나라만이 아니라 일본인 학자가 그 저작들을 수집하고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매개해주었으니 ‘베세토(BeSeTo) 문예공화국’을 상정할 수 있겠다고 쓰고 있었다.

 

이 방면에 문외한이지만 구시대의 동아시아권을 정태적인 역사 내지 일방적인 하방의 문화관계로만 보아왔던 내게 이 구상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은 ‘한류’ 때문에 잊혀진, 그럼에도 1960년대 우리 학계의 화두였던 ‘한국학’에 대한 기억이 우선 되살아났다. 4·19와 5·16으로 시작되는 반세기 전의 이 10년대(decade) 우리 학계는 근대화론과 함께 김철준·손보기·이기백·천관우 등의 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사 재구성 작업에 열중했다. 해방 후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이른바 일제 관학자들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불식하고 우리 민족 자존의 새로운 한국사를 구성한 것이다. 이들의 한국사관은 조선 반도에는 역동적인 역사 없이 지속되어왔다는 정태론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건널목 노릇만 해왔다는 지정학적 숙명론의 일본 식민사관을 거부하고 한국사를 동태사적 전개로 해석하며 주체적 사관을 수립했다. 그 왕성한 전향적 관점과 연구들은 저서와 논문만이 아니라 학회의 세미나와 심포지엄, 신문과 잡지의 특집으로, 국내외에서 열정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정민 교수의 저서에서 50년 전의 그 ‘한국학’ 열정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여기서 연상된 것이 일본어로도 번역된 소설가 홍성원의 마지막 장편소설 <그러나>였다. 이 소설이 드러내는 주제는 역사라는 거시적 서술 때문에 숨어버리고 만 실재 인간 세계의 진실 찾기인데 그 무대가 한·중·일의 동아시아권으로 얽혀 있다. 경영에 크게 성공한 한국의 기업인이 자신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항일투사였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기자인 사위에게 부탁한다. 그 기자가 현지 조사로 발견한 것은 그 독립투사의 훼절이었고 친일파로 매도당한 그의 친구가 사실은 그의 독립운동 자금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여기서 따로 주목한 것은 그 독립투사가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 참에 미인계로 다가온 일본 여인의 도움으로 회생하면서 무력 항일을 포기하고 그녀와 동거하여 가진 두 남매 이야기다. 종전 후 만주에 남은 아들은 중공 치하에서 건실한 농장주가 되었고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간 딸은 발랄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에서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며 조국의 큰아들이 권하는 한국인으로의 귀화를 사양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나는 한국의 한 선비 자식들이 한반도와 중국, 일본에 제각기 뿌리를 박고 살면서 그들 모두가 한국인임을 자부하는 것이 일제 때의 대동아공영권의 한국형 신판 아니겠느냐고 생전의 작가에게 농담을 했지만, 이 설정이 상당히 흥미로운 구상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몽골의 일본 정벌이나 조선조의 임란,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병탄 등 대륙과 섬나라 사이에 끼인 건널목이란 운명에 진저리쳐왔다. 그러나 정민 교수의 ‘베세토 문예공화국’이나 <그러나>의 한국인 장자와 중·일의 두 이복남매 관계를 본다면 반드시 그런 운명론에 젖을 것만이 아니었다. 한말과 식민지 시대의 해외 이주자들로 동아시아에서의 조선족-한국인의 동태가 이제 매우 주목할 위상에 올라 있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이 260만, 일본의 조선·한국인이 90만명이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조선족의 인구 규모는 크지 않지만 중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경제적·문화적 비중에서는 가장 깬 종족이고, 일본에서는 외국 소수민족이 별로 없기에 한국인이 가장 큰 외래 종족이다. 더구나 그들의 모국인 한국이 그 두 나라의 소수민족 중 제일 부강한 원적 국가여서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여기에 동아시아권에 직접적인 관계와 영향이 깊은 미국의 한국인 인구가 210만명이고 러시아가 20만명에 이른다. 이 디아스포라 덕분에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생각보다 크고 중요하다.

 

한반도가 무력한 건널목 자리에서 벗어나 지정학적 요충으로 동아시아의 허브가 될 가능성도 그래서 생각해봄직하다. 한국의 경제문화적 위상과 산업 기술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 수준이지만, 전반적인 현대화에는 못 미치는 중국이나, 지도력을 못 갖춘 일본의 폐쇄적인 사회 문화 분위기에 비해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한국의 위치는 이 3국 관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잠재력을 적잖이 가지고 있다. 중국을 개입시키고 일본에 연장선을 뻗어 1000년 전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는 한국 주도의 새로운 ‘철도 로드’도 그래서 연구해볼 어젠다이고 정민 교수가 주목한 ‘한·중·일 문예공화국’의 허브역도 추진해볼 아이템이며 홍성원의 은근한 ‘신대동아공영권’도 고려해봄직한 테마이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한 후의 첫 방학에 만난 해방을 근 70년 만에 광복절로 고쳐 맞으며 그 여름의 열기 속에서 좀 과감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중화굴기’를 외치며 세계 곳곳에 오성홍기를 휘날리고 있는 중국, 전쟁의 범죄를 모르쇠하고 피해국들의 항의를 되받아치고 있는 일본 극우파의 행태를 보면서, 이제 우리도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운명을 뒤집어, 우리의 지정학적 관점을 강대국을 잇는 건널목이 아니라 대륙과 해양의 가운데에서 새로운 능동적 역할을 발휘할 알박이 땅으로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결기가 솟은 것 같다. 이 도전적 소망이 가능할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오늘의 한국을 주도하는 세대의 자부심과 그것을 뒷받침할 지도자들의 능력이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