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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정희진

by 오직~ 2014. 10. 1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9276.html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보복의 대명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감을 위한 언어다. 며칠 전 지역 도서관 행사에 갔는데 한 여성이 “화를 표현해야 할지, 참아야 할지”를 질문했다. 나는 바로 답했다. “무조건, 맘대로, 즉시 표출하세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맞아요.” 그녀는 물론 청중들은 놀라면서도 즐거워했다(?).

 

알려진 대로 함무라비 법전에 규정되어 있고 성서에도 맥락은 다르지만 유사한 구절이 많다. 실행은 어렵지만(?) 우리도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다. 구약에 “사람이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상대에게 행할 것이니, 뼈를 부러뜨렸으면 상대의 뼈도 부러뜨려라,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레위기 24:17-20) 신약의 마태복음(5:38)은 악을 상대하지 말라는 문맥에서 달리 표현한다. “오른 뺨도 내주고…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도 내주고…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주고”. 구약의 출애굽기(21:22-25)에는 “서로 싸우다가 여인을 낙태케 하였으면 해가 없더라도 남편의 청구대로 벌금을, 피해가 있었으면 생명에는 생명으로… 화상에는 화상으로, 상처에는 상처(wound)로, 구타에는 구타로”. 신명기(19:21)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지 마라. 목숨에는 목숨, 손에는 손, 발에는 발”까지 나온다. 글자 그대로만 본다면, 임신한 여성에게 해를 끼친 자의 “목숨을 뺏으라(take)”는 출애굽기의 구절이 인상적이다.

 

공통된 요지는 같은 상처 입히기. 인과응보의 소박한 형태다.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오른 뺨 대주기”가 고상해 보이지만, 레위기의 율법이 더 공정하다고 해석한다. 이 원칙은 ‘지나친 정의감’ 즉, 복수의 한계를 정한 것이다. 당한 것 이상으로 보복하려는 사태를 막기 위한 법이다. 받은 대로만 돌려주어야지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원뜻은 정의 실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보복과 전쟁을 부추기는 잔인한 의미로 변했다. 신체형(身體刑)에 대한 묘사가 현대인에게 거부감을 주지만 이는 근대 사법제도와 차이일 뿐이다.

 

‘평화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한다. 대화와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노를 관리하라고 권한다. 타임 아웃, 나 전달법, 분노 조절 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평화주의자’인 내 생각은 다르다. 이 말은 분노와 무관하다. 분노라는 현상의 당파성과 공감에 관한 고찰이다.

 

분노의 시작은 억울함이다. 물론, 세상에 안 억울한 사람 없다. 문제는 누구의 억울함인가? 정당한 억울함인가?이다. 분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부정의하다. 가해자의 피해의식이나 권력자의 분노는 규범이고, 약자의 억울한 감정만 분노로 간주된다. 분노를 표출해도 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대개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다. ‘남성’은 이런 의문 자체가 없다. 자기 뜻은 분노가 아니라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다수의 억울한 마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멘토, 치유자를 자처하는 자들을 불러(?) 고결한 가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비열한 폭력인 용서와 화해 이데올로기로 약자의 상처를 짓이기고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죄의식과 자책까지 떠넘긴다. 그래서 우아는 가진 자의 성품이요, 흥분과 분노는 약자의 행패가 되었다.

 

 

이러한 악이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어차피 복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사는 양식은 개체다. 가해는 개별적으로 가해진다. 그러나 몸의 개별성으로 인해 고통은 ‘절대로’ 타인과 공유될 수 없다. 인간은 서로 도울 수 있지만 공감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외로움이다.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것과 비슷하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문제지만 그 고통은 ‘각자들’의 몫이다. 고통을 공감하는 최선의 방법은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분노 표현 논쟁은 부차적이다. 분노의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어떤 분노인가. 가진 자의 더 갖지 못한 분함. 이 외의 모든 분노 표현은 격려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진 자의 탐욕이 실현되는 것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