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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5년, 김대중을 기억한다 - 김삼웅

by 오직~ 2014. 8. 2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1196.html

 

 

 

 

역류하는 세월은 속도가 더 빠른가 보다. 18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년이 된다. 아시아 문제 전문가 버나드 크리셔는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한국인들은 그때 가서야 그에게 정말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석학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인들은 김대중에게 두가지 빚을 지고 있다면서 외환위기 극복과 햇볕정책을 들었다.

 

민주주의, 여성권익 향상, 정보화 강국, 지방자치 확대,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등등.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이다. 반세기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전쟁과 적대로 일관해온 남북관계를 평화와 화해로 물굽이를 돌렸다. 주변 4강과도 적정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국격을 높였다. 반면, 군사독재와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석방하고 박정희기념관을 지원하는 등 ‘원칙 없는 온정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아무리 외환위기 극복의 과정이라지만 비정규직 고용확대 정책은 아픔으로 남는다.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는 안보와 경제발전, 진보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정관념처럼 돼 있는데 그는 5년 재임 기간에 ‘평화로운 안보’와 경술 이래의 국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신탁통치를 극복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김대중 집권을 막기 위해 보수세력은 북한에 밀사를 보내 선거기간 휴전선에서 총질을 해달라는 공작을 벌였다. 족벌신문들은 온갖 음해와 용공조작을 일삼고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이런 가운데 승리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넘겨받은 것이라곤 빈 창고와 보수세력의 증오심뿐이었다. 조선조 인조반정 이래 줄곧 보수세력이 지배해온 나라에서 수평적 정권교체는 정치적 사건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담긴다. 보수세력은 국치를 불러오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집권기간 내내 흔들었다. 그 앞장은 족벌신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공정한 언론의 평가를 받아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했을까.

 

그는 자신이 역사에 설 자리를 아는 지도자였다. 역사의식이 있었고 신념 또한 강했다. 여느 지도자들의 막된 고집이나 냉온탕 정책과는 달랐다. 2009년 초 이명박 정부 1년 만에 민주주의, 중산층과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는 통렬한 지적은 지금 ‘이명박근혜’ 정부의 실태를 극명하게 압축하고 있다.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하고 간첩을 조작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어용화되고, 전교조가 불법화되었다. 민주주의 후퇴, 증산층 몰락, 남북관계 파탄 등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몰렸다. 세월호 참사에 나타난 정부의 무능, 정부인사에서 타락한 군상들을 보았다.

 

생애를 두고 키웠던 야당의 모습은 어떤가. ‘김대중 정신’은 실종되고 130석의 의석을 갖고도 역사의 역류를 막지 못한다. 야당다운 선명성도 치열함도 보여주지 못한 채, 당권투쟁이나 차기 공천에 대한 관심뿐이다. 고종 31년에 만들어진 귀족원을 닮았다. 김 전 대통령은 79석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는데도, 의석 수나 탓하고 정부의 난맥상을 용인하면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서 보여준 무능은 존재성을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김 전 대통령이 1994년 대선 패배 후 영국에 머물 때 템스 강변의 찻집에서 이렇게 물었다. “정계은퇴 선언에서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표현했는데, ‘수사’인가 ‘신념’인가?” 김 전 대통령은 한참 생각하더니 “동양 3국에서 한국은 동학혁명, 3·1운동, 의병전쟁, 독립운동, 임시정부, 4월혁명, 6월항쟁… 우리 국민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나는 역사를 낙관합니다”란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