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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왔나요?”- 홍세화

by 오직~ 2014. 8. 2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1194.html

 

 

 

 

불손하면서 솔직한 질문을 던진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포함된 자’에서 ‘배제된 자’로, 안정에서 불안정으로의 일방통행밖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와 서민에게 묻고 싶다. “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왔나요?”라고. 오늘 국가폭력과 정치권력의 무책임에 의해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 이 시각 권력집단의 횡포와 무능 앞에서 원통함과 억울함,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분들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게 불경한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던진다. “그동안 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왔나요?”라고.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이 땅의 지배세력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능멸하면서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고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한, 앞으로도 강정과 밀양의 분통함, 세월호의 참담함, 군대에서의 억울한 죽음들, 굴종만 강요당하는 노동자들의 고통과 죽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동자이고 서민인 내가 오늘 그들을 지지하고 표를 준다는 것은 내일 내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의 호소를 들어주는 대신 그런 나를 억압하고 배척할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귀족에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뜻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에 자리잡으려면 노블레스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배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가능하듯이, 민주화 또한 지배세력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배하기 어려울 때” 그 가능성이 열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든, 민주화든 오늘 한국의 지배세력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계속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힘이 있기 때문인데, 비극적인 사실은 그 힘의 적지 않은 부분이 그들에게서 없는 자라고 무시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당할 노동자와 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내 자식들이 왜 그 차갑고 캄캄한 곳에서 속절없이 죽어야 했나요?”라는 당연한 물음에서 비롯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를 외면하는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상규명의 무엇이 두려워 기소권과 수사권을 배제하려고 하고 그것을 논리가 아닌 쪽수로 밀어붙이려 하는가. 이 물음 하나로도 우리는 그들의 안면몰수, 후안무치의 성격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그 정치세력에게 매번 표를 줌으로써 그들에게 그럴 수 있도록 쪽수를 채워주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실체를 알려주고 당신 또한 배반당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나를 포함하여 우리는 쉬운 일을 주로 한다. 각자 자신의 지적, 윤리적 우월감을 다독거리면서 다만 평가하거나 개탄할 뿐, 이웃을 설득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 것이다. 송구한 말을 덧붙이자면, 이 글을 읽는 <한겨레> 독자의 대부분도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상 나와 생각이 다른 남을 설득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한국처럼 사회화 과정에서 각자의 의식세계 형성에 관한 자기성찰적 물음이 생략, 소거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어떤 경로로 갖게 되었는지 물을 때 비로소 생각하는 사람으로 출발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자기 생각에 대해 회의할 줄 모르고 다만 고집할 뿐이다. 각자 ‘생각의 문’이 닫혀 있으니 소수의 사회 구성원이 남을 설득해보기도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인식하게 되고 결국 모든 사람이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가령 부부 사이에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을 때 열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생각을 모아가려는 모색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얘기를 꺼내보았자 말다툼으로 끝나는 경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처지에 있어서 동일체이며 몸을 섞는 부부 사이에도 설득하지 않고 설득되지 않는데 과연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남을 설득하지도 않고 설득되지도 않는 사회, 그래서 모든 구성원이 이미 존재의 완성 단계에 이른 사회, 다만 남을 규정하기만 하는 사회는 그렇게 굳게 자리잡혔다. 오래된 격언 -생태적 인식이 결여된- “잡초는 없앨 수 없지만 뽑을 수는 있다”에 비추어 말한다면, 우리는 잡초를 없앨 궁리만 할 뿐 아무도 잡초를 뽑지 않는다. 아무도 주변의 잡초를 뽑지 않으니, 다시 말해 주위 사람을 설득하지 않으니 세상은 바뀌지 않고 우리의 머릿속 궁리는 더욱 대중의 현실과 멀어져 사변적으로 흐르거나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을 안게 된다.

 

이 글은 마침 광복 69주년, 민주공화국 공포 66주년을 맞는 날에 실린다. 기쁜 마음으로 기념하기보다는 착잡함, 씁쓸함을 넘어 비통함과 함께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 불경한 물음도 결국 친일파라고 부르든, 일제부역세력이라고 부르든,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무엇보다 공공성, 공익을 담보해야 한다.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있는 로마의 수도교는 로마 인민에게 물을 공급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보여준다. 당시 가뭄이 들어 물 공급을 줄여야 했을 때 귀족 개인용을 제일 먼저 끊었다. 그런 게 공화국의 정신이다. 우리도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만 사익을 추구하는 세력이 지배하면서 공공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는데 신자유주의가 덮치면서 국가기관은 더욱 지배세력의 사익 추구 확보와 극대화를 위한 발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국가는 이제 이명박 같은 인물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지배계급의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의 놀이터가 된 것이다. 이익이 나면 자기 것이고 손실이 나면 국민에게 떠넘기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꽃놀이패를 언제까지 허용할 것인가.

 

그래서 다시 설득이다. 다른 왕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이웃을 설득하기를 포기했고 스스로 설득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단언컨대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옛 추억의 한 조각으로 회상할 만한 “조직하라, 학습하라, 선전하라!”는 사회운동의 기본원칙과 관련지어 볼 때, 우리는 학습도(스스로 설득되기) 하지 않고 선전도(이웃을 설득하기) 하지 않는다. 남은 건 오로지 조직뿐이니 조직이기주의에 갇히거나 내부에서 알량한 권력을 놓고 다투면서 외부의 극복 대상에 비해 내부의 경쟁 대상에게 더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 설득되고 이웃을 설득하여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는 만큼 사회운동은 건강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 역량을 내부로 꼬이게 하고 소진시켜 버려 지리멸렬 상태에 이른 게 지금 우리의 자화상 아닐까.

 

스스로 설득되기와 이웃을 설득하기, 거듭 말하지만 무척 어렵다. 하지만 무릇 어려운 일일수록 의미가 있으며 쉬운 일일수록 의미가 없는 법이다. 사회운동의 기본원칙인 “조직하라, 학습하라, 선전하라”에 빗대어 이웃을 설득하는 원칙으로 “집요하라, 성실하라, 겸손하라”를 제기해본다. 무엇보다 집요해야 한다. 쉽게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주위의 노동자와 서민에게 묻자. “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왔나요?”라고. 그리고 설득하자. 집안에서도 동네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리고 성실하고 겸손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덕목인데, 이웃을 설득하겠다는 나 또한 선배에게 빚진 자이며 앞으로도 스스로 설득되어야 하는 미완의 존재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