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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국가냐, 재앙의 원천이냐 - 김종철

by 오직~ 2014. 7. 1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7368.html

 

 

 

 

 

세월호 참사로 인한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평소에는 삶의 자명한 전제처럼 여겨졌던 ‘국가’라는 것이 갑자기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매우 어려운 ‘괴물’의 모습으로 그 맨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침몰한 배에서 단 한명의 목숨도 구하지 못한 국가의 행위(혹은 행위의 부재)는, 생때같은 아이들을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는 자기들끼리만 서둘러 탈출해버린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수 국민들이 새삼스럽게나마 국가의 존재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우리들 중 다수가 지금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한갓 거짓 명분이고 위선적 가면일 뿐, 일단 위급상황이 되면 국가는 민중을 버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우리가 너무나 아프게, 또 명확히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비단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만 드러난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온갖 재난 상황에서 일관되게 노정되는 국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이러한 국가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냈고, 그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이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고, 깊은 내상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이라는 국가에만 해당되는 문제도 아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드러낸 모습도 기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사고 초기 방사능이 대량으로 방출되고 있을 때 정부가 어디로 어떻게 피난해야 할지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후쿠시마 주민들은 오히려 방사능 대량피폭 지역으로 피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 초기 대응의 ‘실패’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한 번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주류 기업-언론들의 거의 자발적인 협력 아래 일본 국민과 세계를 향해서 거짓말만 되풀이해왔다. 지금 후쿠시마 사고 현장은 아슬아슬하게 통제되고 있다고는 하나 더 이상의 방사능 차단을 위한 근본대책은 아무것도 마련되지 않은 채 속수무책으로, 기약 없이 태평양과 대기 중으로 방사능이 끊임없이 유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는 완전히 제어되고 있다”는 거짓말로 부패한 국제올림픽위원회를 설득하여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는 등, 미증유의 핵 재해의 실상을 은폐하기 위한 간교한 술책을 부려왔다.

 

그렇지만 핵 재해는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다. 언젠가는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지만, 다만 걱정인 것은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기 전에 태평양과 그 연안 지역 전체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생태계와 인간의 존속이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일본 정부가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갈수록 파시즘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은, 후쿠시마라는 대재앙에 정당하게 대응하고,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무엇보다 정신적 능력)의 결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이 지금 드러내는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적 망상의 근간에는 현실적 무기력 혹은 대응불능에 연유하는 모종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밀고 나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만악의 근원에 국가라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이 걸어온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계사는 어떤 점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다수 인민을 사실상의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의지와 그 의지에 맞서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 전개된 투쟁의 역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투쟁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국가형성의 의지였다.

 

그러나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자립적 인간의 의지는 국가체제의 지배 밑에서도 아직도 다양한 형태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극단적인 경우는 ‘조미아’(동남아시아로부터 티베트 고원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걸친 고산지대에서 ‘국가 없는 삶’을 영위해온 다양한 종족들의 총칭)일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지배 밑에서 노예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속에서 험준한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자신들만의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랜 세월 동안 ‘문명’의 혜택을 멀리하고 가난하고 소박한 자급자족의 삶을 일구어온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조미아’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다소간 국가의 지배 바깥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마음속 깊이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실제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아직도 국가 혹은 국가의 논리와 결합되어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호혜적 관계, 상호부조의 그물을 통하여 영위되고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시 국가체제는 지금, 그리고 예견할 수 있는 장래까지, 우리들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 틀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국가체제를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구소련의 붕괴를 보며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써서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의 저서 <정치 질서의 기원>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성공하려면 국민에 대한 정부의 ‘설명책임’이 불가결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또 하나의 중요한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대런 애쓰모글루 외)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궁극적으로 합리적 정치제도의 운용 여부이다.

 

이 이론가들이 얘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 좌우 정치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국가가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정치지도자들이 공화주의적 덕목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공화주의적 덕목이란 그리 별난 게 아니다. 국가는 특정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유물이 아니라 공화국, 즉 전체 구성원의 공유재산(commonwealth)이라는 인식에 철저한 인간만이 정치가가 되고, 국민의 대표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대다수 국민의 크나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아까운 국토와 강을 못쓰게 만들어버린 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는 것을 회피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도록 특별법을 만들어 조사위원들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정당한 요구를 끝내 외면하려 하는 정치세력이 온존하는 한, 우리는 한걸음도 인간다운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한다. 지금과 같은 몰상식하고도 저열한 정치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들에게 국가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재앙의 원천일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