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구석기인의 '높은' 수준의 자연주의가 그들의 '낮은'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역설에 이른다.
그때는 예술이 주술이고 주술이 예술이었다. 둘 사이엔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지식체계이자 정보 저장과 전달의 수단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고달픈 삶속에서도 예술활동을 계속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술에 취해 자기 아들을 찢어 죽였다. 디오니소스 축제도 갈갈이 찢겨죽은 디오니소스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주술로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이제 신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이 위대한 존재의 권능에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종교가 발생했다.
(예술=주술) → 신 → 철학 ...(예술 ≠ 주술)
과거의 주술은 사물에까지 영혼을 부여했지만 우리의 과학은 영혼까지도 사물화한다.
예술=현실과 가상으로 분리
주술=예술, 종교, 철학
주술은 서서히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상징 형식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시대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가 결정적 역할을 발휘한다.
가령 신까지도 예술적 형상을 빌려 나타냈던 고대 그리스와 예술을 종교의 필요에 종속시키고 과학을 교회의 시녀로 만들었던 중세, 그리고 과학의 오만함이 극성을 부리는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시대가 변하면 이렇게 그 시대의 지배적 상징 형식도 달라진다.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이게 바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미학적 변주곡의 중심 테마다.
자연 모방이란 관념에서 해방된 탓으로, 중세 회화는 대상이 가진 원래의 형태와 색채에서 과감히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밝은 빛과 화려한 색채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 게 바로 중세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중세 사상이 스콜라 철학으로 완성되듯, 중세 예술은 고딕으로 완성된다. 고딕 성당을 사람들은 '돌로 된 스콜라 철학'이라 부른다.
소크라테스(BC470~BC399 처형)
플라톤(BC428)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다 빈치가 회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면 미켈란젤로에게는 조각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었다. 다 빈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라톤 주의)의 신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다 빈치가 자신을 합리적 규칙에 따라 작업하는 과학자라고 생각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영감에 따라 작업하는 고독한 천재로 의식하고 있었다.
17세기 유럽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흐름이 있었다. 고전주의 예술이 데카르트적 '이성'의 예술이라면, 바로크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예술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1714~1762)은 '미학'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가령 인간의 '지성'은 인식론에서, '의지'는 윤리학에서 연구해왔다.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새로운 학문을 생각해내고, 거기에 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스테시스'를 본떠 '에스테티카'란 이름을 붙였다.
이성적, 논리적 인식은 추상적 인식이다. 추상이란 글자 그대로 '상(像)'을 뽑아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추상은 곧 捨像이기도 하다. 대상이 가진 개별적 성질이 모두 사상되므로, 추상적 인식엔 '생생함'이 없다. 그러므로 추상이란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 감성적 인식은 명석함을 높여줌으로써 이러한 '상실'을 보완한다.
바움가르텐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이 가진 이 '인식적 기능'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데 있다.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의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서 완성된다.
취미 판단(미에 대한 판단)은 한갓 '주관'의 쾌, 불쾌에 대한 판단일 뿐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인식이란 어디까지나 사물의 객관적 성질을 파악하는 거니까. 바움가르텐은 이걸 몰랐다.
취미 판단은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주관에 달려 있다는 미적 판단이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길이 있다. 모든 사람이 한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다. 취미 판단의 보편성은 결국 '주관적' 보편타당성이다. 말하자면 그건 인간 '조관'의 구조가 똑같은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아름다움은 사용 '목적'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미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면 단 하나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거다. 칸트는 이를 역설적으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불렀다. 미에는 목적이 없다. 다만 우리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테오도르 립스(1851~1914)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정이입설'이라는 걸로 유명한데, 이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미 이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객관화한 자기 향수'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감정을 자연 속에 집어넣은 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거다.자연의 아름다운 사물은 실은 우리가 그 속에 집어넣은 우리 감정이다.
미학의 과제는 미와 예술의 본질을 밝히는 데 있다. 하지만 미의 본질을 밝히려 하자마자 우리는 이 두 개의 손('그리는 손', 에셔)과 똑같은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상한 고리'는 예술의 세계에도 있고 나아가 논리학과 철학에도 있다. 어쩌면 그건 인간의 정신 구조 자체와 관련된 건지도 모른다.
☆ 미학 오디세이1 (1994/1)
- 진중권 / 휴머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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