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식

사랑, 그 환상의 물매

by 오직~ 2013. 12. 15.

전래의 러브스토리는 '본질'이라는 위상학적 진실과 '기다림'이라는 시간적 묵시가 연정을 매개로 합치하는 꼴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합치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과 거짓, 성공과 실패를 떠나 나는 그냥 받아들이며 긍정한다. 모든 궁극성으로부터 물러나 우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 (,,,) 모험에 부딪혀서도(내게 우연히 다가온) 승리자도 패배자도 아닌 채로 빠져나온다. 나는 비극적이다."(단상)

나는 이렇게 살면서 여자를 만나고자 했다. 바르트의 말처럼 '비극적으로' 만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내 실존의 비극은 늘 제도의 희극에 부딪히곤 했다. 나와 운명의 우연을 엮은 와이어 로프를 제멋대로 잘라서 제뜻대로 수를 놓고 싶어하는 이들을 만나곤 했던 것이다. 억압을 당하는 것이 곧 스스로 제도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역설이 안타까울 뿐.

어느 경전에는,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확연하리라"고 했는데, 사랑하고 미워하는 길을 택하면서 확연하기를 욕심부리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던가? 그러나 저 공식에 따르면 확연한 것 역시 비극적인 것에 불과하니, 결국 사랑을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 정도.

 

 

질투를 너무 순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질투는 말하자면 개가 아니라 원숭이 같은 것이니 소홀히 대하면 당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사랑은 결코 대관소찰大觀小察이 아니라 늘 엉뚱한 소관대찰小觀大察이기 때문.

 

 

어차피 열정이란 그 속성상 휘발하게 된다. 건기乾期에는 우기雨期의 녹색을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국, 휘발을 재촉하는 묘기를 부릴 것인지, 아니면 열정의 분배를 통해서 지속가능한 애정의 형식을 개발할 것인지 하는 것이 문제댜. 밀J.SMill의 지론처럼, 매사 열정의 순도純度나 강도强度가 그 진실을 증거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 일상에 관한 한 분배와 지속가능성이 더욱 바람직한 미덕이니, 사랑의 열정도 굳이 불꽃처럼 산화할 일이 아니다. '불꽃 같은 정열'은 흔히 상상적 나르시시즘의 징후.

 

 

 

사랑은 말과 피부, 그리고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을 재료로 엮는 건축술이기에 균열하거나 훼파되기 쉬운 연하디연한 놀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 놀이에 무슨 무거운 '본질'을 부여하거나 호출하지도 않거니와 이 '연하고 섬세한' 짐승 위에 내 무겁고 둔탁한 몸을 의탁하지도 않으려는 편이다.

 

 

연인들은 '마음'을 챙기느라고 '언어'를 늘 혹사한다. 그래서/그러므로 그 언어의 반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 벼랑 끝에 떠밀리고 나서야 비로소 꿍쳐놓았던 '마음'을 호출하지만 알고보니 호출부호가 없었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의적 분란의 늪을 만들지 말고,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恭待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전략이다.

 

 

연정은 그 본질이 안심을 얻지 못한 상태요, 결국 번뇌의 한 단층이 아니던가. 사랑이 번뇌의 일종이라면 번뇌를 그대로 둔 채 사랑의 내실을 챙기는 전략이 좋을까? 대승大乘의 기본인 '번뇌를 두고 열반을 얻는다不斷煩惱得涅槃'는 이치에 의지하는 것이 효험이 있을까?

'마음'을 둘러싸고 '마음'으로 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생활이 아니다.

 

 

사랑은 '마음'의 거래방식이 아니다.사랑에 관한 한 마음을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생활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무엇보다도, 모른 체해야 하는 것.

 

 

사랑이라는 이상종교는 '무서운 긍정'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은 하찮은 것들로 구성된 귀중한 짓이다. 혹은, 귀중하다고 하는 기표들로 구성된 하찮은 기의다. 고쳐 말하자면, 사랑이란 하찮은 것들이 순간증폭하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정을 키웠던 그 '순간증폭'이 끝나고 우리가 정녕 하찮은 것을 하찮게 대할 수 있는 날들이 오게 되면 사랑의 오랜 영욕榮辱도 마침내 그 수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

 

 

내가 찾는 오늘의 산은 내일의 산이며, 숨는 산이며, 그리고 오지 않는 산이다. 그 '내용 없음', 아니, 그 없음의 깊이, 아니, 그내용의 끝없는 유예야말로 내가 오늘도 산을 찾아나서는 배경이 된다.

 

 

"사랑은 타자성과의 관계, 신비와의 관계, 곧 미래와의 관계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게 거기 있는 세상속에서 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다."

 

 

보행자로서 산을 찾는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고, 산은 '근원적 수줍음' 가운데 그 무엇을 숨긴다. 보행자는 끝없이 산의 거죽을 훑어가지만, 그 보행의 끝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보행에 따라 산의 깊이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치 "숲을, 초원을, 그리고 옥수수가 자라는 밤을 믿듯"(소로우<산보>)이 보행하는 내가 그 보행을 따라 바뀌어가는 것을 믿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극히 부실한 일시적 봉합縫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자기동일성 형이상학의 정서적 변용인 이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사랑은, 실로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그리움은 바로 그 애착의 대상인 반복에 의해서 스스로 마모당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속칭 '첫사랑'이 왜 첫사랑인가 하면, 그것이야말로 반복의 메커니즘을 모르는 채 아침 이슬처럼 왔다 가는 존재이기 때문.

 

 

인습적이므로 더욱 윤리적인 듯한 권력구조를 재현, 재생산하는 주된 장치가 현금의 가족제도라는 사실은, 공사公私를 혼동해서 '자유의 길'을 제약하는 퇴행을 부추긴다.

 

 

세상은 그 자체가 상처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침묵 위로 말이 떠오르고, 몸이 그림자를 지고 다니고, 해가 달을 쫓아다니듯이. 세상은 상처와 숨바꼭질을 한다. 그러므로 결국 세상을 사는 방식은 상처를 처리하는 방식과 동연적이다.

 

 

이를테면 속물적 사회화는 상처의 미봉과 절충, 승화와 전환을 다루는 수법인 것이다. '페르소나'의 기능만을 보더라도 사회화가 얼마나 상처의 문제와 긴절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을 피할 수 없듯이, 상처없이 살 수도 없다. 다만 상처를 은폐하든지, 상처를 드러내든지, 아니면 상처를 미봉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신화와 환상의 역거움을 슬기롭게 견디는 것이 사랑의 묘미가 아닐까? 사랑의 일상에 무슨 손에 잡히는 객관성이 있을라고?

 

 

 

 

 

☆ 사랑, 그 환상의 물매 (2004/8)

    - 김영민 / 마음산책 -

 

 

 

 

 

활자를 눈으로 훑어 내린다 해서

책을 읽은 게 아니다.

한 권을 두루 멈칫멈칫 책장을 다 넘겼다해서

뭘 알아들은 게 아니다.

 

그래서 읽어도 읽은 게 아니다.

 

그래도 읽는다..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학 오디세이2  (0) 2014.02.25
미학 오디세이1  (0) 2014.02.04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0) 2013.10.22
證道歌  (0) 2013.06.30
탄허록  (0) 2013.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