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 마티스는 거기서 색채를 해방시켰다.
모더니즘 예술의 세 가지 현상을 흔히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라고 한다.
'추상'예술은 대상의 구체적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표현'계열의 예술은 대상보다는 주관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 두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물론 피카소와 마티스다.
한편 '레디 메이드'란 글자 그대로 '기성품'으로, 가령 시장에서 물건에 사인을 해서 예술 작품이라 우기는 거다. 이 방법은 다다이스트들이 즐겨 사용했다. 이것이 20세기 예술의 세 가지 커다란 줄기다.
또 하나의 흐름은 전통적인 화법으로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를 그리려 했던 초현실주의. 살바도르 달리, 호앙 미로, 막스 에른스트, 그리고 르네 마그리트...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한 '직관적' 인식이다. 그건 지성을 이용한 '논리적' 인식과 구별된다. 논리적 인식(학문)은 보편자를 인식하지만, 직관적 인식(예술)은 개별자를 인식한다. 논리적 인식이 '개념'을 생산한다면 직관적 인식은 개개 사물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직관에선 실제와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다.직관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산출한다. 직관은 이렇게 위로는 개념과 아래로는 객관과 구별된다.
직관은 '표상' 혹은 '이미지'다.
진정한 직관은 곧 '표현'이라는 거다.
표현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건 이미 직관이 아니다.
예술적 직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므로, 예술적 직관에 관한 학문은 일상적 직관에 관한 학문과 같다. 따라서 미학은 누구나 갖고 있는 일상적인 직관을 연구한다. 크로체는 미학을 토대로 '정신철학'의 체계를 쌓아올린다. 왜? 미적 인식, 즉 직관적 인식은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우리에게 현상의 세계를 제공하며, 개념은 예지계 즉 정신을 제공한다. 그러나 개념은 언제나 직관에서 출발하고, 또 그 안엔 언제나 직관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우리의 선입관(과학적 세계관)을 버리는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선입관이라면 나쁜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거야말로 '선입관에 대한 선입관'이다. 선입관(Vorurteile)이란 글자 그대로 선(先)판단이다. 그건 우리 사회가 이제까지 쌓아왔고, 또 당신이 성장하면서 배워온 어떤 지적 전통, 세계관, 가치관 따위를 말한다.
물론 선입관이 항상 옳으란 법은 없다. 하지만 머리속에서 선입관을 지운다면 그 순간 당신의 머리는 백지가 되고 만다. 텅 빈 머리로는 '객관적으로'는 고사하고 도대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선입관이야말로 오히려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안경'이 찌그러졌으면 어쩌냐고? 가령 중세의 안경은 태양이 지구를 돌게 만들지 않았냐고? 하지만 어쩌랴. 안경을 벗으면 아예 볼 수가 없는데.
예술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잡다한 사물들 속에 감추어진 사물의 참모습을 본다. 마치 플라톤이 이 세상의 사물을 보고 그것들의 이데아를 떠올리는 것처럼. 하지만 문득 우리는 그것들이 사실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바로 그거라는 걸 개닫게 된다. 우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걸 새롭게 인식한 거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재인식'이다.
칸트는 예술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보았다. 그는 예술을 내용에서 분리시켜 '형식'으로 환원해버렸다. 그에게 예술의 목적은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 쾌감을 주는 데 있었으며, 예술은 자연의 총아인 천재의 소산이었다. 그럼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건 곧 천재의 체험을 수용자가 그대로 따라서 체험하는 게 된다. 이 형식주의적, 주관주의적, 쾌락주의적 노선이 바로 칸트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서구 미학의 주된 노선이다.
가다머는 바로 이 노선에 대항하려 한다. 그는 예술을 다시 진리와 연결시킨다. 예술은 존재의 탈은폐로서의 진리를 열어준다. 예술은 순수한 상상력, 한갓 공상이 아니라 사물의 참모습의 '미메시스'다. 따라서 예술 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감이 아니라 재인식의 즐거움이다. (형식미학과 진리미학)
이제까지의 미학은 주로 '작용미학'이었다. 즉 주로 작품이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력만을 강조해왔다는 얘기다. 하지만 수용미학은 거기에 독자의 적극적인 '수용'의 측면을 결합하여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수용자 중심의 예술론을 만들어냈다.
다다이스트들은 문명을 조롱하고 전통을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온 모든 가치를 전복하려고 했다. 그 가치들 속엔 물론 예술도 포함된다. 그들은 예술까지도 조롱했고 예술을 '아무것도 아닌 것', '애들 장난감(다다)'으로 만들어버리려 했다. 다다가 종종 '반(反) 예술적'이라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뒤샹의 작품은 이를 잘 보여준다. <L.H.O.O.Q.>
우리 사회엔 '예술계'라는 세계가 있다. 말하자면 예술가, 비평가, 화상(畵商) 등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 말이다. 이 예술계에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한 대상이 바로 예술 작품이라는 거다. (제도로서의 예술)
뒤샹이라는 예술가가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예술은 무엇인가? 물론 '예술계에서 자격을 부여한 대상'이다.
이제 문제는 '예술계'라는 말이다. 예술계란 무엇인가?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예술'이란 말이 아직 정의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예술은 무엇인가? 그럼 다시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한 대상..... 에셔의 그림을 보라. 예술계는 예술을 낳고 예술은 예술계를 낳고 예술계는 다시 예술을 낳고... <그리는 손>
미란 질서와 복잡성의 함수.
아름다움은 질서또는 예측 가능성(네그엔트로피)과 예측 불가능성(엔트로피)의 함수 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일탈과 질서, 예측 불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이 적절한 비례를 이룰 때 사물은 가장 아름답다는 얘기다.
정보엔 미적 정보만 있는 게 아니다. '의미 정보'라는 것도 있다. 미적 정보는 수학자 버코프의 공식에서 '복잡성'에 해당한다. 반면 의미 정보는 '질서'에 해당한다.
작품이 불확실할 때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끼고, 작품이 질서정연하고 예측 가능할 때 우리는 작품의 '의미'를 이해한다. 따라서 미적 정보는 엔트로피와 일치하고, 의미 정보는 네그엔트로피와 일치한다.
대개 에셔의 패러독스는 '통사론적' 규칙을 깨는 데서 비롯된다. 문장에 비유하자면 애초에 문법 자체가 틀린 그림이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대개 '의미론적' 차원의 것이다. 말하자면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가 이상하다는 얘기다. 가령 '물고기는 다리가 둘이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현실에선 이상한 의미를 갖는다.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형식'에 들어 있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반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즉 의미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내용'이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형식 체계에 관심이 있었고, 마그리트는 철학,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심이 있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 되었을 거다.
☆ 미학 오디세이2 (1994/1)
- 진중권 / 휴머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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