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의 놀이가 들어선다. 세계는 더 이상 단 하나의 그림 안에 한꺼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현실은 사라졌다.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은 사라졌다. 이제 세계는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무한히 이어지는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게 현실이며 이게 현대의 지각이다. 모네는 이 현대인의 눈을 가지고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으로 현실의 견고함을 사라지게 한 최초의 화가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원래 세상에는 '하나'의 거대한 의지가 있었다. 이 의지가 개별화 원리에 따라 갈라져 우리가 보는 이 표상의 세계가 탄생한다. '의지'라는 근원적 존재에서 갈라져나온 파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조그만 '의지'의 파편들, 뭔가 하려고 하는 조그만 욕망의 조각들이다. 각자 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기에 개별 의지들은 서로 부딪혀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얽히고 설킨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 세계'라 부른다. 우리가 저 근원적 의지 속에서 하나였을 때, 우리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었다. 그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었고 '세계'도 없었다.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과 질량과 빛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있고, 그렇게 빨아들인 모든 것을 다시 토해놓는 '화이트홀'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차이들을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차이들을 토해내는 화이트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게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representation)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어느 미디어 철학자의 말처럼 20세기 예술은 "형상금지(정신화)와 영상의 홍수(기술복제)라는 양면으로부터 협공"당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나 재현에 있는게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사건을 일으키는 데에 있다. 즉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잊혀진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에 있다.
고흐의 작품 앞에서 구두를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적 시각은 깨지고,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존재체험, 이런 존재 사건을 일으키는 게 예술 작품의 본질이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존재'의 현시(presentation)에 있다.
진리가 자신을 '보존'하기를 요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겠지. 그것은 이미 낡은 가치관이 되었으니까. '보존'은 곧 '보수'라는 얘기..
헤겔은 감히 자연의 결함을 얘기한다. 자연미는 불완전하다. 완전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면 그것을 뜯어고쳐야 한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자연미는 예술미의 모범이 아니다. 그것의 불완전한 재료일 뿐이다. 이 관계의 역전에서 아도르노는 병적 징후를 본다. '자연미의 결함' 운운하는 헤겔의 논리는 근대의 자연정복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억지로 인간에 동화시키는 것을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의 인간화'라 불렀다. 마르크스 같은 이도 이를 '진보'라 부르며 축성했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보기에 자연의 인간화란 결국 '자연의 탈자연화'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자연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게 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은 정신이 아니다. 과학이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양적 측면일 뿐이다. 과학이 신비를 폭로해도 자연의 질적 측면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비밀로 남는다. 자연의 정말 자연다운 부분은 과학의 추적을 따돌리고 이성의 저편에서 끝내 정신의 '타자'로 남는다. 끝없이 달아나며 신비함을 보존하는 자연.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연의 이 끝없는 탈주를 미메시스한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로 속에서 현명하게 길을 잃는 자,
구원의 길을, 진리의 길을 발견하리니...
(다니엘 카스파 로헨슈타인 <어느 미로의 명문>)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가 되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려면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사실과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은 미디어다. 그것이 비로소 사건을 사건으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실이 원본의 형태보다도 복제의 형태로 더 중요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는 복제가 현실을 베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복제를 베끼는 사태가 벌어진다.
소비는 어떤가? 멀쩡한 제품을 고장나기도 전에 새 것으로 바꾼다. 가령 10년 쓸 자동차를 3년 쓰고 버릴 때 소비자는 자동차 가격의 30퍼센트만 지불한 게 아니다. 100퍼센트 다 지불하고 실제로는 30퍼센트만 소비하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70퍼센트는? 그것은 아마 기호의 값일 게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한 상품과 다른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사물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이 상품과 상품 '사이'를 소비하고 그 '차이'를 지불하기 위해 일하는 거대한 꿈의 세계, 어른들의 디즈니랜드다.
모더니즘은 '차이'의 생산이었다. 현대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 때문에 '얼마나 진실하게 묘사했느냐'가 아니라 '다른 작품과 얼마나 다른가'가 작품성의 기준이 된다. 덕분에 우리는 무한히 다양한 예술언어를 갖게 됐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르다'는 것도 어떤 한계 내에서다. 그 도를 넘어서면 '다르다'는 것도 의미를 잃게 된다. 저마다 모두 다를 때, 남과 다르다는 것은 외려 남과 같다는 뜻이 된다. 왜? 남과 '다르다'는 것이 모든 이의 특징이니까.
차이의 생산이 극에 달하면 외려 모든 차이가 소멸한다. 이 역설이 일어나는 지점을 보드리야르는 "가치의 황홀경"이라 부른다. 현대는 이미 개별자의 차이가 지워져 거대한 일자로 합류하는 디오니소스의 황홀경에 있다. '차이'의 생산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모던'은 종말을 고하고 사회는 이미 동일자를 무한 증식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가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 부른다. 미적인 것이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외려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되고 있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도시 풍경, 예술을 방불케 하는 기발한 상업광고, 작품을 연상케 하는 멋진 상품들, 예술은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여기서 예술은 종언을 고한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예술이 종언을 고할 때 사라지는 것은 외려 현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복잡하게 뒤엉킨 새로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쨌든 우리에게 익숙했던 현실은 사라지고 있다. 엘리스 앞의 체셔 고양이처럼 천. 천.히,
☆ 미학 오디세이3 (2004)
- 진중권 / 휴머니스트 -
1, 2권은 20년 전에, 3권은 10년 전에 쓰인 책이다.
철학과 미학에 문외한이 읽기에는 세월의 갭이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것.
여전히 어려우면서 재미있으니 다시 십년 후에 읽는다한들
그 재미는 줄어들지 않을 것 같으며 이해 또한 완벽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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