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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의 정치인 - 이계삼

by 오직~ 2014. 1. 2.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7169.html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을 지키고, 모든 문제를 국민 중심으로 풀어가야 한다.” 경찰이 민주노총 본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다음날 대통령이 한 말이라고 한다. 나는 좀 우습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은 대통령을 두고 ‘수첩 공주’니 ‘100단어 공주’니 하며 비아냥거리지만, 그건 뭘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전략을 구사하는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그가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전국을 싹쓸이하기 직전 불의의 테러를 당했을 때, 병원에서 깨어나면서 “대전은요?”라고 물었다던 그 순간, 유일하게 경합을 벌이던 대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나라당 품으로 넘어왔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2008년 총선에서도 그랬다.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 이 기막힌 한마디에 쟁점 없이 비척대던 선거판은 친박 대 친이의 깔끔한 구도를 찾았고, ‘강부자’도, 영어몰입교육도, 한반도대운하도, 야당과 진보정당의 입지도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나름대로 고도의 언어전략을 구사한다. 가장 돈이 되는 노선을 투자 자본에 내다 팔고, 적자로 누더기가 된 노선들만으로 이 거대한 공기업을 끌고 가겠다는 발상이 결국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누구나 알 법한데, 그는 이것을 ‘국민 중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영장도 없이 언론사가 소유한 건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서도 ‘원칙’을 지키는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절반가량의 국민은 아직도 그가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50% 아래로 떨어진 지지율은 한복 예닐곱벌 챙겨서 해외순방 한번 다녀오면 다시 올라올 것이니 별걱정은 없을 것이다.

 

딱 1년 전 대통령 선거가 끝났을 때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이 정부가 통치를 잘하면 어떡하나’ 걱정들을 했다. 이른바 ‘보수정치의 정상화’,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치가 바닥으로 떨어져버렸을 때, 복지라는 떡고물을 던져주고, 경제민주화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땟국물 범벅인 인사들 대신에 참신하고 깨끗한 보수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 어떡하나, ‘이러다 보수의 천년왕국이 열리는 것 아냐?’ 뭐 이런 걱정들을 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것이었음은 1년 만에 판명이 난 것 같다.

 

밀양 송전탑 싸움으로 2년 동안 싸움의 현장에 서 있었던 내가 정권 걱정을 할 계제는 아니지만, 이 정권이 더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가 제구실을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기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치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사회적 과정 자체가 정치를 통해서만 맺고 풀도록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가 질식할 것만 같은 수많은 현장들에 아주 작은 숨통이라도 틔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정치는 오직 한 사람만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특별하고도 강력한 캐릭터, 고도의 언어전략, 그리고 패션감각만이 정치의 무대에서 독주했을 뿐이다. 여당과 정부는 집사 노릇만 했으며, 모든 국가기구가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당은 지리멸렬했으며, 언론은 기능부전 상태에 빠져 있다.

 

단언컨대 지금 이 나라에서 자유인은 대통령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한 사람이 ‘국민 중심’이라는 환상의 궁전에서 홀로 댓글만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이 나라의 가장 큰 비극이다. 결국 그 한 사람이 무너지는 길밖에는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그 많던 정치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