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시장역에서 출발해 충장로·광주공원 거쳐 양림동까지 7.5㎞
호남권 최대 규모 양동시장 1300여 점포 빼곡
100년 역사의 양동시장은 광복 이후 호남권 최대규모의 재래시장으로 떠오른 곳이다. 일제강점기 광주천변에 있던 옛 큰장터·작은장터를 옮겨 합친 이곳엔 6개 단위시장, 1300여 점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복개천 상가도 옆에 있다. 양동신협 옆 상가 2층 옥상, 지난 9월 초 문을 연 양동문화센터①로 올라간다. 양동시장을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꾸려진 공간이다. 베트남·중국·일본 등의 음식을 내는 다문화 행복장터, 홍어 전문식당인 홍애, 다문화 공방·상점 등이 들어서 있다. 지금 문화센터에선 광주비엔날레(11월7일까지) 공식 프로그램의 하나인 ‘양동시장 장삼이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양동시장은 매월 셋쨋주 일요일 휴무.
흑산홍어·영광굴비·진도돌미역 깔린 수산물시장 거쳐 닭전 쪽으로 향한다. 속초상회 네거리 동원상회 옆으로 비좁은 옛 골목이 나타난다. 수십년 전 모습 그대로인 골목이다. 상인·주민들이 식수로 쓰고 빨래·목욕도 하던 오래된 공동우물(한뎃샘·통샘)②이 이곳에 있다. 지금도 모터로 끌어올린 물을 닭집들이 나눠 쓴다. 골목 모습은 그대로지만,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다. 닭전거리 뒷골목에서 40여년째 살고 있다는 신승철(70)씨가 말했다. “아파트가 쌨는디 누가 여그서 살락합디여. 냄새나고 헌께, 다 나가 불고 인자 일고여덟집밖에 없서라.”
“즉석에서 골라 잡아 디리고 만오천원서 이만오천원 허는”, 닭똥 냄새, 꼬꼬댁 소리 자욱한 닭집거리엔 염소고기·개고기를 파는 곳도 눈에 띈다. 케이디비생명(금호생명) 빌딩 앞으로 나와 복개천을 건넌다. 일제강점기에 광주천에서 가장 큰 나무다리(한다리)가 있었다는 곳이다. 지상 주차장 입구 옆에 구두닦이·수선집이 있다. 부부가 함께 닦고 고치며, 돼지저금통에 수입금의 10%를 넣어, 석달에 한번꼴로 결식아동·소년소녀가장을 돕는다는 신세계구두수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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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행(옛 조흥은행) 네거리 거쳐 광주극장⑤으로 걷는다. 1935년 문을 연, 호남지역 최초로 한국인 자본으로 지어진 극장이다. 이 극장이 대형 상영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예술영화나 실험성 강한 문제작들을 상영해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극장 운영이사 김형수씨는 “일반 영화관에 안 걸리는 영화 위주로 1년에 150편 정도를 상영한다”고 소개했다. 입구에 내거는 영화간판도 손으로 그린다.
아치형 조형물이 높이 솟은 광주교 건너 물가의 석서정⑥을 만난다. 석서정이란 본디 고려 우왕 때 양림동 쪽 광주천 한가운데 석축을 쌓고 지었다는 정자다. 제자리 아닌 곳에 최근 복원한 것이지만, 이 정자에 걸린 ‘석서정기’를 들여다볼 만하다. 목은 이색(1328~1396)이 지은 글로, 이 글의 첫머리가 ‘빛의 고을(光之州理)은 지세가 세 방면이 다 큰 산인데 북쪽만 평탄하다’로 시작된다. ‘빛고을’이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느티나무숲 울창한 광주공원(성거산·성구산)으로 올라 고려시대 광주서오층석탑(보물 제109호)⑦을 감상한다. 산 형세가 북쪽을 향한 거북 형상인데, 거북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거북 등엔 절(성거사)을 세우고, 발엔 향교를, 목 부분엔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일제는 성거산 터에 일본 신사를 세웠다. 지금 그 자리엔 현충탑이 자리잡았다. 광주공원은 쉬고 거닐고 논쟁하는 어르신들 세상이다. 20여기의 관찰사·목사 선정비 무리⑧가 아름답다. 빗돌이 웅장하기로는 광주향교⑨ 문 앞에 도열한 광주향교중수기 비들이다. 맨 왼쪽 비(광주향교중신기)가 가장 오래되고, 또 정면을 응시하는 멋진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이고 있어 감상할 만하다.
사직공원길로 올라 관덕정 거쳐 사직단⑩으로 간다. 관에서 토지·곡식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장소다. 조선 태조 때 처음 이곳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한때는 동물원이 들어서 있었다. 숲은 울창한데 차량이 드나들어 쾌적한 맛은 적다.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내려와 언덕 위에 자리잡은 양파정⑪을 거친다. 일제강점기의 갑부 정낙교가 1914년 지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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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105-28(양림동 떡볶이)을 거쳐 사직도서관 앞 선교사비를 만난다. 나주·목포를 거쳐 1904년 광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남장로교) 유진 벨(배유지)과 오웬(오기원)이 주민을 모아놓고 첫 예배를 드리던 장소라고 한다. 호남신학대 운동장 옆 산으로 오르면 선교사 22명이 잠든 선교사 묘역◇이 있다.
양림동은 근대문화유산 보고… 음악가 정율성 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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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넘었다는 호랑가시나무를 보고 내려가 광주·전남 여성교육의 요람 수피아여중고 안으로 들어간다. 오른쪽 언덕 위에 배유지 기념예배당(1924년)(19)이 있다. 1911년 제니 스피어의 헌금으로 건축한 수피아홀(20)은 꽤 큰 규모다. 네덜란드 양식 건물로, 광주여학교가 광주수피아여학교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운동장 가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낙우송(21) 한 그루가 있다. 1963년 수피아여고 같은 반 학생들이 20년 뒤에 나무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심은 나무로, 1983년 이 나무 앞에서 재회한 졸업생들은 다시 20년 뒤에 모이기로 했고, 2003년엔 같은 학년 전체가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고 한다.
학교를 나와 광주 근대의료의 발상지 광주기독병원 뒤뜰의 선교사 송덕비들(22)을 보고 오기원기념각(23)을 만나러 기독간호대학 안으로 들어간다. 의사이자 선교사인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를 기념해 친지들의 성금을 모아 1914년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예술회관·전시관·교육시설로 활용돼 신문화·민족의식을 확산하는 전당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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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8한겨레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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