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숲이 병풍처럼, 거목들이 성처럼 함양군청에서 상림 숲길, 이은대, 중앙시장 거쳐 함양문화원까지 7.5km | |
경남 함양은 거목들이 이룬 오래된 숲의 고장이다. 천년 숲 상림 말고도, 거리 곳곳에 400~500년 묵은 느티나무들이 큰 그늘을 만들어 어르신들을 모은다. 그리고 더 큰 그늘을 드리운 거목들이 있다. 신라 때 함양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 조선 초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다. 군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큰 나무들이 거느린 빛과 그늘 안에서 일하고 또 쉰다. 자부심도 아픔도 이 그늘 아래 있다. 함양군청에서 걷기 시작해 상림과 위천 길, 읍내 골목과 함양시장 길을 밟아 다시 군청으로 돌아온다.
느티나무 그늘 짙은 군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옆의 함양초등학교로 간다. 학교 옆에 ‘거대한 뿌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기다린다.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①(천연기념물·사진)로 불리는 나무다. 높이가 21m인데, 줄기 둘레는 9m에 이른다. 안내판엔 1000년 수령의 ‘천년목’이라 적었으나,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 때 학사루 옆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문화관광 해설사 전영순씨는 “주민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하는 나무”라며 “이렇게 오래되고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는 보기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무수히 뻗은 가지들에선 매미들이 일제히 울어대 온갖 소음을 삼키는데, 그늘에 든 어린이들은 용케도 재잘재잘 할 말 다 한다.
길 건너 학사루②로 간다. 함양초교 자리는 본디 함양읍성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객사로 들던 2층 문루가 학사루다. 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9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현판도 기둥에 내건 주련도 모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디 통일신라 때부터 있던 누로, 최치원이 태수로 있을 때 이 누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해온다. 자원봉사센터 지나 어탕국수로 이름난 조샌집이 있는 네거리 거쳐 길 건너 골목으로 든다. 식당도 이발소도 다방도 간판에 ‘연’ ‘연밭’이 들어 있다. 지명이 연밭머리다. 해병대 기동순찰대 앞을 지나 보림사 쪽으로 걷는다. 길바닥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가 눈부신데, 열린 대문간에 앉으신 두 할머니가 보인다. 옆엔 달덩이 같은 박들을 쌓아 놓고 막걸리를 자시는 중이다. “박 깎아 말리갖고 너물(나물) 하모 차암 좋아예. 아들 줄라꼬.”(유상달씨·71) “서울서 왔다꼬. 하매야, 우리 큰아도 서울 안 있소. 그 아가 차암 효자라. 아침저녁 전활 해요. 우찌 지내노, 밥 잡샀노 하고….”(김봉순씨·85) 갑자기 눈 붉히시며 건네는 막걸리잔을 받아 들이켜니 시원하고 푸근하고 짭짤한 고향 맛이다.
함양 군민 대대로 거닐어온 아늑한 숲길 보림사(주지 수인 스님)는 1912년에 창건했다는 절. 이 절 미륵전에, 용산사 터 민가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온, 고려 초기의 석조여래입상③이 있다. 상림으로 향한다. 숲이 아름답다고 할 때 이 숲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들어서는 순간 어둑하고 아늑한 숲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최치원이 위천 물길을 돌리고 조성했다고 전해온다. 주민들이 대대로 거닐고 노닐어 온 부모 품 같은 숲이다. 길이 1.6㎞. 숲 안엔 볼거리도 즐비하다. 함양읍성의 남문이던 망악루(함화루)⑤, 고려시대 석불⑥, 30여기의 선정비 무리와 척화비⑦, 최치원 신도비와 정자 사운정·초선정이 있다. 느티나무·개서어나무가 몸을 섞은 연리목④도 보인다. 상림 옆엔 2만평 넓이의 연밭을 만들었고, 끝자락엔 물레방아를 복원해 놓았다. 상림 위쪽 죽장마을은 조선 성종 때 문장가 뇌계 유호인이 살던 곳이다. 그가 노모 봉양을 위해 낙향(선산)하려 하자 성종이 “이시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쏘냐…그려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하는 ‘이별가’를 부르며 잡으려 했던 충신이다.
고운교 앞으로 나와 위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돌북교(함양3교) 지나 거센 물살이 바위를 휘감아 흐르는 소고대⑧를 바라보며 두루침교(함양1교) 쪽으로 간다. 왼쪽 운림리와 용평리 사이 거리는 옛 시장(시비전거리)이 있던 곳이다. 새 시장(중앙시장)이 생기며 상권이 쇠퇴했다. 두루침교를 건너면 백연리(栢淵里), 잠시 걸으면 함양국유림관리소다. 일제강점기 임업시험장이 있던 곳이다. 1940년에 일본식·서양식을 섞어 지은 시험장 건물⑨(등록문화재)은 현재 산림정보관으로 쓰인다. 국유림관리소에선 목공예체험을 무료로 할 수 있다. 토요일 휴관. 백연리 산자락엔 대나무숲이 유난히 많다. 하백(두루침)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정완봉(72)씨가 말했다. “저짝 대나무밭은 다 비삣다. 백로 때문이라. 밤새 깨르륵 캐쌓고 잠도 몬자고 빨래도 몬넌다. 똥 찍찍 깔기고, 대나무가 다 죽어 나간다카이.” 대나무숲을 베어 버리자, 백로는 아랫마을 인당의 대나무밭으로 옮겨갔다.
김종직 사당·일제신사 거쳐 충혼탑 자리잡아 인당은 30~40년 전까지 가난한 서민들의 마을이었다. 비좁은 골목마다 술집·밥집이 줄을 잇고 폭력배도 득실댔다지만, 이젠 대로가 뚫리고 큼직한 식당들도 들어선 한적한 마을로 바뀌었다. 제2교(인당교) 건너 즉석에서 재료를 만들어 비벼 먹는 보리밥이 맛있다는 허름한 이교식당 지나, 직접 갈아 내는 콩국이 너무 진해 문제라는 제일식당 들여다보고 중앙시장⑬으로 향한다. 거리엔 대나무 깃대를 높이 세운 점집들이 많다. 시장 골목 안에 옛 정취가 남은 제일여인숙이 있다. 낡고 비좁은 방이 ‘제8호실’까지 있는 단층 여인숙으로, 장날(2·7일) 지방 상인들이 묵어 가는 곳이다. 1박 1만5000원. 시장 안의 이름 있는 식당을 물으니 “피순대집이 안 있소” 하고 나서는 분이 있다. 이틀에 한번쯤 시장 골목을 둘러봐야 살맛이 난다는 허형수(56)씨다. 지리산문학회 회원이라는 그가 데리고 간 곳은 50년째 대를 이어 순대를 직접 만들어 팔아온 병곡식당이다. “함양 흑돼지 대창·소창을 매일 100마리분을 손질해 당면 없이 선지와 야채로만 속을 채워” 순대를 만드는 집이다.
시장을 나서 길 건너 동문사거리로 간다. 함양읍성의 동문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읍성의 동·서·남문이 헐리고 옮겨지고 성곽도 사라졌다. 필봉산(문필봉) 바라보며 함양중학교로 걷는다. 중학교 주변이 조선시대 이전엔 마을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밝고 새롭고 바르게’ 빗돌 지나 본관에 이르면 뜬금없이, 여기저기 깨지고 금가고 떨어져나간 커다란 좌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로 지정된 ‘함양석조여래좌상’⑭이다. 중학교 자리가 고려시대 절로 추정되는 용산사 터다.
오던 길 내려와 함양성당 옆길로 든다. 성당 일부 담벽이 옛 성돌을 닮았다. 그러나 함양문화원 김성진 원장은 “성당 쪽에서 쌓은 석축으로 함양읍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골목 안 문화원에 들르면 함양 역사와 문화, 인물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새들마을빌라·해누리빌라 사이 길로 걸으면 출발했던 함양초교 체육관 옆 느티나무에 이른다. 매미 소리 그대로이고 아이들 재잘거림도 여전한데, 느티나무가 볼수록 아름다워 그 곁에 오래 앉아 있고 싶었다. 7.5㎞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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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글·사진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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