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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행렬 : 독립운동 100주년에 본 영화 두 편 - 서경식

by 오직~ 2019. 3. 1.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 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 가도다/ 진흙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드면, 단잠은 얽맬 것을/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이상화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푸른 대해원. 하늘 높이 한 마리 바닷새. 자연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듯하다. 그 해면에 하나의 점 같은 배가 떠 있다. 카메라가 다가가자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다. 지중해를 건너려는 난민들을 가득 실은 배다. 메마른 사막. 차가운 비가 계속 퍼붓는 변경의 철도역. 군사용 철조망으로 무자비하게 갈라진 경계. 눈비에 젖은 채 망연자실 서 있는 사람들.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실로 “진흙을 밥으로, 해채(시궁창 물)를 마셔도”의 사람들 행렬이다.


영화를 보는 중에 이상화의 시구가 계속 뇌리에 떠올랐다. 1920년대에 한반도에서 만주로 흘러간 난민 무리, 2017년에 중동에서 유럽을 향한 난민 무리. 두 행렬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 긴 행렬은 전세계에 걸쳐 있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아, 검(神)아.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그 영화는 아이웨이웨이(艾未未)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대지 표류>(Human Flow, 2017년 독일)다. 세계 23개국 40곳의 난민캠프들을 돌며 제작했다. ‘난민문제’의 최전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대한 시각. 그 영상은 아름답고 처절하다.


중국의 아티스트 아이웨이웨이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새집’의 설계에 참여해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인권운동에도 분투하는 반골의 사회운동가다. 그 때문에 2011년에 베이징 자택에 연금당했으나 그 이듬해에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웨이웨이는 절대 미안해하지 않는다>(Ai Weiwei: Never Sorry, 앨리슨 클레이먼 감독)에서 엄중한 감시하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그 뒤 베를린으로 옮겨가 ‘난민’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2017년 요코하마미술관 벽면 전체에 나붙은 무수한 오렌지색 물체들이 때마침 불어온 태풍의 풍우에 격렬하게 나부끼는 것을 봤다. 아이웨이웨이의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실제로 난민들이 타고 바다를 건넌(또는 건너는 데 실패한) 고무보트를 사용한 것이었다.


“만일 예술가들이 사회의 양심을 배반한다면, 인간의 근본원칙을 배반한다면, 도대체 예술이 어디에 설 수 있단 말인가?”(스위스의 학예사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대담, 2011년)


‘사회의 양심’ ‘인간의 근본원칙’. 이런 생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멸당하거나 적어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 않는가. 이런 소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인도주의를 이토록 확신을 갖고, 이토록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얘기하다니. ‘인도주의’라는 이름의 방파제는 지금 지상의 도처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인간에게 절망해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농민이 몇백년을 변함없이 가뭄으로 갈라진 밭을 열심히 가꿔왔듯이 양심이나 인간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사람들이 늘 존재했다. 그런 것도 아이웨이웨이를 통해 깨닫게 된다.


또 한 편의 최근 본 영화.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 감독의 <트랜짓>(Transit)이다. 원작은 아나 제거스(Anna Seghers, 1900~1983)의 소설. 그녀의 작품이 지금 다시 읽히고 영화화되고 있는 사실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역시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리라.


1920년대부터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제거스는 1928년에 독일 공산당에 입당. 1933년에 나치스 집권 뒤 체포당했으나, 결혼해서 헝가리로 국적이 바뀐 덕에 석방돼 프랑스로 망명했다. 1940년에 나치스 세력이 프랑스에까지 뻗치자 마르세유로 갔고, 1941년에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 작품은 자신의 목숨을 건 실체험을 토대로 마르세유에서 쓴 것이다.


<트랜짓>이란 통과사증을 가리킨다. 당시 마르세유에는 전쟁과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통과사증을 비롯한 각종 증명서 취득을 위한 번잡한 수속과 냉혹한 관료주의에 농락당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만난 남녀의 애절한 로맨스가 그려진다. 고향을 쫓겨난 자들이 느끼는 극도의 불안을 이토록 깊이 포착해낸 작품은 흔치 않다.


이 영화의 뛰어난 착상은 70년도 더 지난 시절의 역사를 그리면서 마르세유의 거리나 교차하는 차량들, 항구를 떠나는 배 등은 모두 현재의 것을 그대로 등장시키고 있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다수의 관객은 영화 속에서 본 것이 아무리 비참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을 과거의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가까스로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940년대 유럽 난민들의 운명은 지금 난민들의 운명이다. 이 영화는 과거를 묘사하면서 현재를 묻고 있는 것이다.


3·1독립선언 100주년이다. 이상화는 1900년, 즉 20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태어났다.(제거스와 동년배다) 그가 10살 때 일본이 조선을 병탄했고, 19살 때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 자신 동무들과 궐기 계획을 짰으나 사전에 발각돼 좌절했다. 1923년에 도쿄로 건너갔으나 그해 9월 간토(관동)대지진을 만났다. 많은 동포들이 학살당한 현장을 체험했고, 그 자신도 자경단에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서두의 시는 1920년대에 일제의 농촌 수탈의 결과 유민이 돼 고향을 버리고 북으로 떠난 사람들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그들이 중국 조선족의 원류 중 하나다. 같은 시기에 남쪽으로 흘러가 바다를 건넌 사람들이 재일 조선인의 원류다. 내 할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20년대의 조선인 농민과 21세기의 난민은 연결돼 있다. 이상화와 아이웨이웨이는 이어져 있다.


‘3·1독립선언 기초자’의 한 사람인 한용운은 “민적(民籍)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라고 노래했다.(‘당신을 보았습니다’ <님의 침묵> 초판 1926년)


‘민적’은 일제 통감부가 조선 민족에게 강요한 제도다. 거기에 저항한 사람들에게는 ‘인권’이 없었다. 한용운의 시구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난민들의 고통을 예견했다. 참으로 천재적인 통찰! 한용운과 제거스는 이어져 있다. 시인들에게 그런 통찰을 요구하는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니 점점 더 정교하고 가혹하게 이어지고 있다.


한용운은 8·15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라고 노래했던 이육사는 베이징에서 옥사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노래한 윤동주는 해방 반년 전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인들은 그나마 가까스로 시를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겼으나, 많은 사람들은 말도 하지 못한 채 무참하게 목숨을 빼앗겼다.

3·1독립운동으로부터 100년. 나는 이른 봄 도쿄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생각한다. 아, 참으로 긴 난민들의 행렬. 참으로 많이 흘린 눈물과 피. 그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세계에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역사수정주의자가 권력을 쥐고 있고, 국민 다수 속에 식민주의 심성이 오히려 증식되고 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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