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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by 오직~ 2018. 6. 17.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져멋는다.

내 늘글 적이면 넨들 아니 늘글소냐

아마도 너 죳녀 단니다가 남 우일까 하노라

(어찌 늘 젊어있느냐..

마음만을 쫓아다니다가 남들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된다.)

- 화담 서경덕

 

매양 늙지도 않는 듯 관념의 무시간적 이치들만을 여전히 고집하는 마음에 일침을 가하며, 몸을 무시한 채 세속의 밖에서 생각으로 온존하려는 마음의 허위를 매섭게 친다.

 

 

정녕 도달하고 싶은 대상은 이념으로 소실되어버리거나 현실이라는 알리바이 속에 봉인된 채, 내내 우리들은 우연찮게 곁에 있던 대상에 실없는 의미를 매겨 욕망하거나, 그 어떤 '무엇'을 닮은 것을 바로 그 닮았다는 사소하고 우연한 인연을 강조하며 과장스레 다시 욕망하는 것, 바로 이 욕망의 복합체를 일러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념과 욕망의 교착(交錯), 진정성과 모방성의 혼동, 생각과 실천의 소외에 따른 부족과 미달, 혹은 과장과 잉여를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나는 일,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나는 일,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나는 일을 두고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열정은 무익'(사르트르)하지만, 그러나 " 그 열정의 수고로움만이 인간 존재의 표식(標式)"(포이어바흐)이다.

 

 

문학적 공간이란 바로 그 어리석음을 미학적 서사물로 재생산해내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어리석지 않은 세상, 즉 '세속'이 아닌 세상속에서는 이미 문학적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이란 어리석음이라는 인간됨의 '한계'를 '조건'으로 승화시키는 상징적 장치 중의 하나다.

 

 

우리는 우연하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모방과 전염, 유사와 인접, 은유와 환유의 복합적 세속 속으로 휘말려든다.

 

 

인문학자라면 자신의 전공에 무관하게 일상적으로 시나 소설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그것은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기 전에 먼저 물길을 알아야 하는 이치와도 같다.

 

 

진실은 어긋남의 사실을 사후적으로 깨단하는 그 부재의 힘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긋나지 않을 때에는 아예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

 

 

현명하지 못한 호의나 성숙하지 못한 선의가 의도보다 빠르게 관계의 지옥을 불러들이듯이, 삶의 원초적 어긋남과 인생의 근원적 사이성(Zwischensein)을 망각한 문화(文化)는 필연코 문화(文禍)를 낳게 된다.

 

 

표륜(漂淪)할 뿐 기착(着)할 수 없는 자, 오늘이 아닌 내일을 거주처로 삼아야 하는 자, 그 같은 '어긋남'을 자신의 존재 성분으로 품은 자, 바로 그가 이방인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마주 대하며 말하고 살아야 하는 자, 成에 안주하기 보다 未完을 향해 손을 내미는 자, 바로 그가 이방인이다. 혹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내일의 번개를 기다리며 오늘은 먹구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 바로 그가 이방인이다.

 

 

인간은, 인간의 진리가 부과한 자기한계 속에서 최선의 선택과 실천에 나설 뿐이다. 돌려 말하자면 바로 그 선택과 실천의 어긋남 속에서, 그 어긋남의 수행적 효과 속에서 인간의 진리는 곧 자기한계가 되는 것이다.

 

 

"옛것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오늘에 통하기는 어렵다. 빈말은 귀한 것이 아니나, 실용에 알맞게 하는 것은 귀한 것이다."  = 홍대용=

 

 

환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이미 환상의 자기동일적 神이거나 비환상의 자기동일적 동물이다.

 

 

인간 그 자체가 하나의 복합적 어긋남이다.

 

 

매사가 어긋난다. 결심이나 조심만으로 어긋남을 피할 수 없다. 어긋남은 세속 속에서 생기는 다만 일개의 불운한 사건이나 현상이 아니다. 어긋남은 차라리 구조이며, 세속이란 그 구조와 구성적으로 연루된 인간들의 관계, 그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긋남은 그것 자체로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해야 한다. 공부와 견준 '생각'이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신뢰를 쌓지 못한 호의가 아직 아무 성취가 아닌 것처럼, 세속의 어긋남은 아직 아무런 패착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속이 평균적 무지 가운데 도달한 솔직한 현실의 단면일 뿐이다. 마치 민중이 세속의 외부가 아니라 세속 그 자체의 구성일 뿐이며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처럼, 세속의 어긋남도 세속 그 자체의 구조적 구성일 뿐이며, 그래서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2011)

    - 김영민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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