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연인 박근혜를 사형시키자고 하지 않는다. 광장에 끌고 나와 조리돌림하자고도 안 한다. 광장에 나와 퇴진하라는 촛불을 드는 것으로 분노를 절제하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란 작자는 못 들은 척한다. 이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대통령이란 자리를 방패 삼아 결사항전한다. 목숨을 재촉하는 오기다. 수의 입고 수갑 찬 실물 크기의 박근혜 등신대가 광장에 등장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판국이다. 한달새 광장의 인파가 한번에 3만명에서 190만명으로 늘었다. 다섯차례 계속된 촛불집회 참가자만 연인원 400만명이 넘는다. 나라야 어찌되든 자기 개인의 안위만 따지는 박근혜가 촛불바다의 일등공신이다.
광장의 촛불은 배후가 있어야 하고 잘못된 군중심리로 번져갈 위험성이 있다는 정치집단이나 언론의 우려는 틀렸다. 촛불의 속도는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변했다. 때론 꽃이 북상하는 속도 시속 1킬로미터로, 때론 트랙터가 질주하는 속도 시속 20킬로미터로, 때론 치타가 달리는 속도 시속 100킬로미터로. 그런 촛불의 압력으로 수사조차 할 수 없다 생각한 대통령을 검찰은 피의자로 적시했다. 경찰이 가만히만 있으면 세계가 놀랄 만한 평화시위가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광장에 나선 이들은 촛불의 속도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없다고 느낀다. 제1야당 원내대표가 광장에서 싸우는 방식이 있고 제도권에서 싸우는 방식이 있다고 광장과 정치가 동떨어진 것처럼 얘기했지만 둘은 다르지 않다. 광장의 민심을 제도권으로 최대한 반영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고 그게 대의민주주의다. 2인3각 경기처럼 촛불의 속도에 최대한 맞추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지금까진 <한겨레>와 제이티비시(JTBC) 정도만 촛불의 속도와 보조를 맞춘다는 느낌이었는데 그에 필적할 만한 집단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진 법원이 그 주인공이다. 법원은 집회 허용 구간을 촛불의 속도에 맞춰 일주일마다 조정했다. ‘대통령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집회’라서 청와대 앞 800미터까지 집회를 허용하고, 다음주엔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한 집회’라서 400미터까지, 그다음주엔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항의와 책임을 촉구’하려면 청와대 앞 200미터까지 집회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법원의 결정문은 얼마나 신속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음에 우리는 청와대 관저 앞에서 박근혜 구속 수사를 외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지금 우리의 마음이다. 정치집단도 그렇게 촛불의 속도를 대변해 달라는 것이다.
박근혜와 그 일당이 뻔뻔하게 버틴다고 얼핏 만만해 보이는 촛불 민심만 설득하려는 행위는 직무유기다. 최선의 정치적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은 좋지만 아직도 탄핵이 국회에서 부결되거나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면 그 충격을 어쩌느냐고 정치공학적 고민을 하는 건 촛불의 속도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다. 촛불이 횃불 된 지 오래다. 거의 모든 국민이 촛횃불을 들고 광장으로 달려나오는 판에 탄핵이 국회에서 부결되거나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면 정치적인 당신들만의 공방 수준에서 끝날 거라고 보는가. 국회를 무력화시키거나 헌법재판소를 뒤엎을 만한 촛불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 그게 촛불 민심이다. 촛불의 속도에 맞춰 달라.
오래전 혁명의 시인 김남주가 ‘낫’이란 시에서 이미 그 방법을 알려줬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촛불의 속도를 깔보는 집단은 낫 부메랑을 맞을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2334.html#csidx99480085fe308ee99ca012993028c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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