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 같은 스포츠 행사와 록 콘서트 같은 대중문화 행사에서 벌어지는 폭력 행위의 분출은 물론 항상 정치적으로 과잉 규정된다. 그곳에서 폭발한 것은 실제로는 경제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문화적인 갈등들이다. 하지만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든 형태의 훌리거니즘이 때때로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발터 베냐민이 성스러운 폭력이라고 정의한 것과 모호하게 맞아떨어진다.
2005년 가을 프랑스 대도시의 교외지역들에서 벌어진 폭동을 회고해보자. 수천대의 자동차가 불타고, 대중의 폭력이 대규모로 분출했다. 그것이 그토록 놀라웠던 점은 시위대들 사이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전망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1968년 5월의 사건이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가지고 일어난 봉기였다면, 2005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봉기는 어떤 전망을 가진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이데올로기 시대에서 계속 반복되는 공통점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파리 교외에서 시위대는 어떤 특별한 요구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은 모호하고, 관련 없는 원한(르상티망)에 근거해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주장을 했을 뿐이다. 여기서 포퓰리즘은 비이성적 한계와 마주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0단계의 시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폭력적인 시위 행동이다.
불타는 파리 교외의 시위에서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다는 사실 그 자체야말로 해석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곤경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즉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라고 자축하지만, 실제로는 강요된 민주적 합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눈먼 선택뿐이라는 것을. 그러한 감정적 폭발은 이후 매우 다른 정치적 프로젝트들에 사로잡힐 수 있는 복잡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이번 미국 대선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가 바로 이러한 똑같은 원천에서 그들 각자의 에너지를 이끌어냈다.
우리는 그러한 분노가 공공 분야의 전반적 질적 하락의 분명한 징후라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몇달 전까지, 도널드 트럼프는 점잖은 음주 파티가 열리고 있는 방의 한쪽에서 요란하게 배변하는 사람 정도로 비유되었다. 그러나 미국 대선에 나섰던 다른 공화당 후보들이 본질적으로 더 나은 정치인들이었던가? 우리는 아마도 스페인 초현실주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자유의 환상>(Phantom of Liberty)에서 식사와 배설을 기묘하게 뒤집었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식탁 주변에서 변기 위에 앉아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를 하러 가고 싶어지면 집사를 불러 “그곳이 어디죠?”라고 조용히 묻고 나서 뒤편에 있는 작은 방으로 살금살금 간다. 그 비유를 좀 더 확장하자면, 미국 공화당 후보들의 토론은 부뉴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임과 비슷하지 않았던가? 전세계의 많은 주요 정치인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르드족에 대한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배신자, 외국 스파이라고 비난하며 편집증적 분노를 터뜨린 것은 대중 앞에서 배설을 하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았는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체첸인들을 대상으로 의학적 거세까지 하고 있는 체첸 정책을 비판하는 이들을 (국내에서의 푸틴의 인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정교하게 계산된 공공연한 야만적 언사로) 위협할 때 그 또한 대중 앞에서 배설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그 밖에도 비슷한 사례의 리스트는 계속 이어진다. 2015년 10월21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세계시온주의자연맹 연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독일에서 몰아내려 했을 뿐이며, 그들을 절멸시키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그랜드 무프티(이슬람 고위 성직자)였던 하지 아민 후사이니가 히틀러를 부추겨 유대인들을 죽이게 했다’는 주장을 한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 또한 축구장에서 벌어지는 싸움보다 훨씬 위험한 훌리거니즘 폭력행위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헤겔이 인륜(Sittlichkeit)이라고 부른, 사회생활의 (불문율적인) 규범들의 두터운 바탕,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를 구별하게 하는 두텁고 이해하기 어려운 윤리적 실체다. 이러한 규범들은 오늘날 산산조각으로 해체되고 있다.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공적인 논쟁에서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던 말들이 이제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공공연히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훨씬 절박한 ‘진짜’ 문제들과 직면하고 있을 때, 우리는 왜 공손함과 공공예절을 이야기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토머스 드퀸시의 살인의 단순한 기술에 대한 유명한 재담, 즉 “얼마나 많은 이들이 테러와 경제적 재난을 촉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파티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가?” 하는 수준으로 퇴행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긴박한 상황에서는 분명 예절이 중요하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며,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아주 미세한 경계선이다. 최근의 대중적 야만의 폭주 사례에 대해 주목할 만하며,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 즉 1960년대를 돌아보면 종종 벌어진 폭력적 행위들은 정치적 좌파와 연결되곤 했다. 학생 혁명가들은 정치 용어에서 공식적 정치와 대비되는 자신들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만의 언어를 썼다. 하지만 오늘날 저속한 언어는 거의 모두가 극우파의 배타적인 특징이며, 좌파들은 자신들이 품위와 공공예절의 수호자라는 기묘한 위치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훌리거니즘을 온건한 진보적 정치인들의 발언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올해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의 게이 바에서 49명을 숨지게 하고 53명에게 부상을 입힌 총격 사건이 벌어진 이후, 일부 무슬림 근본주의 조직의 대표들이 ‘이 행위 자체는 개탄할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퇴폐와 무슬림들에 대한 군사적 침공에 대항하는 전쟁 행위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한 주장이 우리의 유대-기독교 문화에는 완전히 낯선 것이며, 야만적인 광기라고 분노하는 대중의 격렬한 반응을 상상해보자. 하지만 잠깐. 1996년 5월12일 미국 <시비에스>(CBS) 방송의 ‘60분’(60 Minutes)에 출연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앵커 레슬리 스톨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라크에서 전쟁으로 50만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 히로시마에서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숨졌다. 당신은 이것이 치를 만한 대가라고 생각하는가?” 올브라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어려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대가는 치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푸틴이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또는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가 이런 대답을 했다면 어떤 지옥이 열렸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곧바로 우리 서방 언론의 모든 머리기사마다 그들을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야만적인 괴물이라고 비난하는 제목들로 도배되지 않겠는가?
올해 미국 대선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선거유세를 하면서 올브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을 돕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지옥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즉 클린턴 대신 샌더스에게 투표하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할 것이다. “한 국가를 망가뜨린 군사적 개입 때문에 50만명의 어린이가 죽는 것이 치를 만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에게는 지옥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고.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가장 위험한 훌리건들이라고.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1855.html#csidxcc5c1a8b63dcee090536ff9b0ae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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