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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근본이 흔들린 답은 오답이다 - 유홍준

by 오직~ 2016. 11. 18.

벌써 며칠째인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지 근 한 달이 되어가는 동안 뜻하지 않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18일자로 돌아오는 나의 칼럼에 무엇에 관해 쓰냐는 고민이었다. 내가 신문에 이름 석 자를 내건 고정 칼럼을 쓰고 있는 것은 문화유산 전문가로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글을 써 달라고 위탁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내 전공 분야의 범위에서 삶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이번 칼럼에서도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 속의 도시, 도시 속의 미술’(23일까지)을 소개하려고 두어 차례 전시회를 꼼꼼히 보고 글도 거의 다 써놓았다. 요지인즉 이제까지 박물관의 특별전은 ‘고려청자전’ ‘고려불화전’ 등 명품 나열 식이었지만, 이번 기획전은 미술을 통해 조선시대 도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전시인지라 볼거리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는 깨달음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전시 내용을 자세히 해설해 놓은 것인데 지금 이 자리에 그 글을 실은들 누가 읽어주기나 할지 막막할뿐더러 이 판국에 한가하게 옛날 미술 얘기를 꺼낸다는 핀잔을 면치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선 나 자신이 그러고 싶지가 않다. 외면받을 글을 쓴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수치인 것이다.


시국에 맞추어 문화를 말하자면 최순실, 차은택이 문화융성이라는 이름으로 문화계를 도륙질한 얘기를 해야 마땅한데 사실 나는 그쪽 분야에 몸담은 적이 없어 그 실상을 잘 모른다. 저들이 미술시장으로는 쳐들어오지 않은 덕에 미술계는 환난을 피했다고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나의 입장으로 말하자면 문화유산 전문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지식인이고 국민이다. 더욱이 지금은 국민의 입장이라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나는 지난 12일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싶어 진행하던 부여답사 도중 각지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당도했을 때는 행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깨동무하고 투쟁을 외치는 시위행진이 아니었다. 행진 자체가 무의미했다.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만으로 시위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었다. 이어 열린 문화제는 농락당한 주권을 마땅히 돌려받자는 거대한 국민 회합의 장이었다. 비장한 목소리로 뜨거운 맹세를 부르는 ‘동지가’가 아니라 “하야, 하야, 하야”를 랩에 실어 노래하고 거기에 맞추어 촛불이 파도를 이루며 춤추는 국민축제의 한마당이었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은 ‘하야’라는 낯선 단어 대신 ‘내려와! 내려와!’를 외쳤다. 그 이상의 구호가 필요없었다.


나는 여기서 우리 국민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그동안 우리나라를 조롱했던 세계가 이를 보면서 과연 대한민국이라고 감탄하며 실추된 국격을 다시 회복시키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이튿날 한 신문에 참관기를 기고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40년간 중요한 시위를 다 참가해 보았지만 이런 평화적인 국민행동은 처음이었다. 우리에겐 고귀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저항의 디엔에이(DNA)가 있다. 우리의 시위 문화가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랜 역사적 경험의 결과이다.

1910년 한일합병 때 이야기다. 통곡의 시절이었지만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국민적 역량이 부족했다. 그 시절 국민의 슬픔과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대한제국 시절 3대 시인으로는 이건창, 김택영, 황현을 꼽는다. 이건창은 일제가 준동할 무렵 세상을 떠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택영은 상해로 망명했고 매천 황현은 전라도 구례로 낙향해 버렸다.


그리고 1910년, 이윽고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매천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지식인의 사명을 다하였다. 훗날 김택영이 쓴 <매천 황현 전기>에는 매천이 자결할 때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한일합병이 체결된 것은 음력 7월25일이었고 매천이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8월3일이었으며 이틀 뒤인 8월5일 매천은 절명시 4수와 함께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결행했다.


“나에겐 자결할 강한 의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오백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지키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러고는 바로 아편을 술에 탄 독약을 마셨는데 약기운이 퍼지는 데 하루가 걸렸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생 황원이 달려가 형을 보고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 묻자 매천이 말하기를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죽는다는 게 쉽지는 않더라. 독약을 마실 때 (약사발을 입에서) 세 번이나 대었다 떼었다 하였단다. 내가 이처럼 바보였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운명하였으니 향년 56세였다. 매천의 절명시 4수 중 한 수는 다음과 같다.


새들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 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지식인의 저항뿐만이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보여준 국민의 항쟁은 정말로 뿌리 깊다. 1862년 이른바 진주민란이라고 불리는 임술년의 농민 봉기가 있었고, 1894년엔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다. 한일합병 전후로 두 차례의 의병운동이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은 세계를 놀라게 한 국민행동이었고,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정부 수립 후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고,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절 사실상 ‘데모하면 5년 이상 사형에 처한다’는 긴급조치하에서도 데모가 일어났다. 그리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군부독재를 종식시켰다.


그 연장선에서 우리는 지금 정의는 반드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범국민행동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뜻있는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깨어 있는 국민에 의한 촛불시위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성숙하여 갔다. 인류 문명사에 이런 국민적 역량을 보여준 나라는 없다. 이 점에서 나는 역사적 행복과 자랑을 느낀다.


그동안 정국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야 뒤에 생길 수 있는 국정공백을 걱정하기도 하고 탄핵이 국회나 헌법재판소에서 부결될 수도 있는 상황을 고민하기도 하고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정략적으로 유리한가를 셈해보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럴 경우 국민이 가만있을 것 같은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근본과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원칙과 근본이 흔들린 답은 오답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이름으로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다. 무조건 하야해야 한다. 내려오지 않으면 끌어내려야 한다. 그것이 답이다. 그렇기에 그럴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에게 준엄하게 말한다. 국민이 또 나서기 전에 똑바로 하라고. 잔머리 굴리지 말고 국민을 바라보고 바른길로 가라고.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07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