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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벗이여! 촛불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 김상봉

by 오직~ 2016. 11. 17.

좌절과 냉소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답답하던 시간, 가진 것 없는 부모에게 태어나 지옥 같은 세상에서 혼자 낙오할까 두려워 한 뼘 독서실 칸막이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온갖 스펙을 쌓겠다고 발버둥치던 시간은 이제 지났습니다. 여러분은 골방을 박차고 나와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아니 역사의 횃불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낙오의 공포를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박근혜 앞에서, 최순실 앞에서, 정유라 앞에서 또는 우병우 같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날 때부터 낙오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낙오자인데 더 낙오할 무엇이 있어 낙오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혼자라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던 그 모든 ‘노오력’들이, 박근혜가 선장실에서 저희만의 쾌락에 취해 있을 때, 세월호처럼 침몰해 가는 대한민국에서 부질없다는 것을 이제 우리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여러분은 비로소 여러분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승만의 독재를 무너뜨렸듯이, 그리고 여러분의 부모 세대가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를 끝냈듯이, 이제 여러분도 노예적 굴종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긍지 높은 자유인의 역사를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여러분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우리가 너희만할 때는 말이야’ 하면서 여러분의 젊은 날을 자랑스럽게 회상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회고에는 으레 절반의 허풍이 섞여 있겠지만, 여러분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은 그 모든 허풍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감사와 사랑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용기와 지혜로, 가축들의 지옥을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땅으로 만들어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시골 무당의 진단과 예견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지금부터 여러분이 걸어야 할 그 길은 결코 걷기 쉬운 꽃길은 아닙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기 위해 여러분은 여러분이 마주한 악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87년 전두환 독재가 끝이 나고 그나마 형식적인 민주주의라도 쟁취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이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위기를 맞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야당이 여당이 되는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죽은 독재자의 딸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비록 더디게라도 역사가 한 걸음씩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이명박과 박근혜의 악몽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치는 민주화했으나 경제는 전혀 민주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처럼 노사공동결정제도가 없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업은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입니다. 그런데 군부독재가 물러간 자리에 재벌의 독재가 들어서고, 자본이 흡혈귀처럼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은 민중인데, 민중이 누려야 할 자유는 자본가들이 마음 놓고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자유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국가는 근본적으로 가진 자의 편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국가권력을 장악한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벌이 찔러주는 검은돈으로 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과 그 이전·이후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외환위기 상황에서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이 땅의 민초들이 적으나마 금을 모아 나라의 금고를 채워주었을 때, 재벌 개혁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리해고로 보답했습니다. 그 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 나라는 북한에서 국가 위에 당이 있고 당 위에 수령이 있듯이, 국가 위에 삼성이 있고 삼성 위에 이건희가 있는 나라가 되었는데, 노 대통령은 이를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우아하게 표현했습니다. 재벌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이고, 정부가 시민을 그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어떤 바보가 자기의 예금통장과 아파트보다 정부를 더 믿겠습니까? 믿을 것이 돈밖에 없는 세상에서 돈 없는 후보보다 돈 많은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선택이었으나 개인의 입장에서 결코 비합리적인 선택만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감시해야 할 대다수 언론은 그들 자신이 일종의 언론 재벌이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습니다. 이명박은 성공한 샐러리맨으로 포장되고, 박근혜는 그 아비가 우상화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맹목적인 지지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87년 민주화 이후 이 나라는 실질적으로 보자면 재벌과 족벌 언론과 그들이 기르는 도사견이나 다름없는 정치인들이 장악한 국가기구의 삼각동맹에 기반해서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 삼각동맹에 균열을 낸 것이야말로 박근혜의 극락왕생할 공덕입니다. 시작은 삼성의 이건희가 물려받은 돈에 중독되어 인간의 분수를 망각하고 리움이다 뭐다 하면서 뮤즈 여신의 흉내를 내다가 운명의 여신의 타격을 받아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 상태에 들어간 일입니다. 그 자식들은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피하고 삼성의 경영권을 무리 없이 승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청와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주님으로 자랐던 박근혜에게 이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겠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근본 없는 벼락부자들을 무릎 꿇리고 드디어 온 우주의 기운을 받아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로 등극할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구중궁궐에서 그분이 누구와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알 만할 것 알고 살뜰하게 청와대 사정을 염려해 왔습니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나라를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네 특권계급의 이익을 세심하게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청와대가 국민의 지지를 아주 잃어버리게 되면 다음 대선에서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사건 이후 부쩍 나랏일에 대해 염려가 늘었고, 지난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뒤에는 눈에 띄게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내년이 대선인데 계속 청와대가 이렇게 나가면 정말로 정권을 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까칠한 훈계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끝이 우병우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 뒷일은 모두가 아는 대로입니다. 청와대는 여당 국회의원을 사주해 조선일보를 부패 언론이라 공격하면서 주필의 비리를 폭로했고, 꼼짝없이 걸려든 송희영 주필은 사표를 내야 했습니다. 조선일보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들은 백년 권력이고 박근혜는 5년 권력입니다. 게다가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도 자기들입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동업자들 사이의 선의의 충고를 악으로 갚았으니, 조폭 조직이 그렇듯이 조선일보는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그리고 이런 배은망덕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끝까지 보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근혜 퇴진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추운 밤, 늦게까지 촛불을 드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일보가 자기들의 시간표에 따라 적당한 때 적당한 방식으로 그 배신자들을 확실하게 처리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조선일보는 부패한 극우 족벌 언론의 이미지를 깨끗하게 벗어던진 뒤에, 합리적인 보수 애국 세력의 대표를 자임하면서 차기 대선의 재집권 프로그램을 가동할 것입니다. 87년의 상황을 회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조선일보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야당을 서로 합치지 못하게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야당을 서로 이간질하면서 이 당 저 당의 자칭 대권주자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고, 다른 한편으로 새누리당의 신장개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 적절하게 여당의 대권주자를 홍보해주기만 하면, 야당은 분열로 자멸하게 마련입니다. 청와대에서 오란다고 혼자 가는 추미애 대표를 보십시오.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제가 다른 곳에서 이미 예견한 대로, 이대로 가면 십중팔구 야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이 나라의 특권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랫동안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소가 찾아올 것이고, 세상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입니다.


비판을 넘어 형성을

그럼 여러분의 정말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조선일보의 구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박근혜 이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앞의 일을 위해서는 이제 박근혜 하야만큼 야당의 통합을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합니다. 저의 경험과 판단으로 민주당과 국민의당 그리고 정의당 모두 이념의 차이는 없습니다. 실은 새누리당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종인, 이상돈 의원이 어느 당 출신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다른 당을 만든 것은 영업을 위해서일 뿐인데, 그런 까닭에 그들은 스스로 합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당이 저렇게 분열해 있으면, 촛불을 백날 들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지금 합법적인 권력은 의회 권력밖에 없고, 미우나 고우나 대안세력은 야당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정당은 나중에 만드십시오. 지금은 우선 세 야당에게 합치라고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박근혜 게이트를 철저히 파헤쳐 진실을 규명하고 합당한 책임을 물으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특검법에 따라 대통령이 특별검사를 임명하여 한시적으로 수사를 해서는 이것 역시 하나 마나입니다. 국회에서 과거 반민특위법처럼 새로운 국민검찰단 구성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 피의자인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임명하는 특별검찰단을 구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 전두환을 수사했고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나 이 정부에서 불이익을 당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나 윤석열 검사 같은 이들로 특검을 구성해서 성역 없이 수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누구를 심판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 아래서 우리 세대는 그 야만적인 국가 폭력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반독재 투쟁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설계할지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피 흘려 군부독재를 타도하였으나, 밖으로는 신자유주의의 해일에 속수무책이었고 안으로는 온 나라를 재벌의 놀이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우리 세대의 한계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처럼 푸릇푸릇하던 시절, 오직 자유로운 하늘을 꿈꾼 죄로 전기고문과 물고문과 성고문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 아래서 몸과 마음이 걸레처럼 찢겨나가던 그 악몽의 시간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폭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취조실 난로의 석유를 자기 몸에 붓고 분신을 기도하던 젊은 영혼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에게 미래를 준비하고 설계할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 우리 세대는 여러분들이 화염병 대신 촛불을 들고 열린 광장에서 평화로이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외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니, 도둑질한 재산이 아니라 자유로운 광장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여러분에게 물려준 값을 따질 수 없는 유산입니다. 그 광장에서 이제 여러분은 비판과 저항에서 멈추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세상을 스스로 설계하고 형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처럼 젊은 생명이 반도체 만들다 암으로 죽고, 스크린도어 고치다가 전동차에 치여 죽고, 정화조 청소하다가 질식해 죽고, 배 타고 수학여행 가다가 물에 빠져 죽지 않는 나라를 이제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더러는 마르크스와 레닌에게서 더러는 김일성 주체사상에서 그 설계도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둘 다 새로운 나라의 설계도로는 아무 쓸모가 없었던지라, 미국이 퍼뜨린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세대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형성의 지혜입니다. 함석헌이 말했듯이, 오직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삽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02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