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과 능청에도 서툰 친구가 하나 있다. 자신의 역할을 빈틈없이 해내려고 하며, 또 빈틈없이 살아가려는 바른생활 친구다. 정작 그의 문제는 바로 그 빈틈없음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왔다. 그는 사람들과 나누는 모든 소통을 자신의 빈틈을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자극을 참말 아니면 거짓말로 분류하는 버릇이 있었던 게다. 그가 세월이 갈수록 너무 작은 것에 민감하게 상처받고 정작 큰 거짓말에는 둔감해졌고, 결국 얼마 전 나를 찾아와 “생이 힘들다”고 털어놓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매사에 정통하려다가 정작 매사에 꽉 막힌 캐릭터로 오해받고 있었던 게다.
과연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세상일까? 나는 그리 대답하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은 원래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자극들로 가득 차 있던 놈 아니던가.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참과 거짓이라는 딱 두 가지 범주로만 대응하던 그의 단조로움이 오히려 상처와 재난을 키우고 있던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살아가면서 참말도 거짓말도 아닌 말들을 너무나 많이 만나게 된다. 농담, 능청, 내숭, 변명도 다 그렇고, 심지어 인사말도 그렇다. 이것은 공기에서 질소가 갖는 위상과 같다. 공기를 이루는 것은 산소(참말)나 이산화탄소(거짓말)뿐만 아니라, 80%가 이도 저도 아닌 질소 아닌가.
참과 거짓 사이에 무언가가 있으면…, 순간 떠올랐던 것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상황이었다. 한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고 눈물을 흘리고, 스크린 앞에선 관객도 함께 눈물 흘리고 감동한다. 누구나 저 눈물이 연기된 가짜 눈물인 것을 알지만, 그러한 거짓에의 인지가 공감을 막진 못한다. 감동하는 관객 누구도, 거짓 눈물에 속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조차 그 순간에 흘리는 눈물에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기 때문이다. 배우의 연기야말로 참과 거짓 중간쯤에 있는 놈인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는 빈틈으로서만 정의된다.
모든 게 완벽한 캐릭터는 매력이 없다. 강하지만 속으로 물러터지고, 반대로 겉으론 무르지만 속으로 강인한 캐릭터, 그리하여 실수도 하고 거짓말도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직시하게 되는 캐릭터가 언제나 박수 받는다. 배우는 진짜 인물도 허구의 인물도 아니다. 배역은 참과 거짓 사이에서 수행되는 역할인 게다. 결코 그 빈틈을 메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 빈틈을 그만의 리듬으로 연주하는.
아마도 내 친구가 몰랐던 사실은 이것일 게다. 배우가 참과 거짓 중간쯤 되는 질소 같은 애매함으로 수행해내는 배역처럼, 우리네 세상도 사실은 참말과 거짓말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빈틈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흡사 내숭이나 능청의 밀당 속에서 점차 완성되어가는 배역의 앙상블이라는 사실, 결국 이 세상은 연출자가 없을 뿐인 배역의 공동체라는 사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배역에 빈틈을 없애려던 메소드 연기법과 그 창안자인 스타니슬랍스키의 잘못이다. 빈틈을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심지어 그것으로 농담 따먹기를 지어먹는 와중에, 자신의 욕망과 그 한계에 솔직하게 다가서는 캐서베티스의 영화. 지금 보러 가자. 친구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76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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