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에, 지(芝)에게 최승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 수록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주관적으로 확언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사자가 그 말을 할 때에는 설사 신세 한탄의 형식을 취한다 해도 그것이 자기 직시의 효과를 발휘해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이 그런 말을, 그것도 그를 그 불행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의사도 없이 할 때는, 그런 말이야말로 그가 미래의 다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꺾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 시인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강조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사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을 ‘존재 일반’의 그것으로 규정한다 할지라도, 읽는 사람 쪽에서는 고통에도 성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평론가 김현이 “최승자의 시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다.”(<말들의 풍경>)라고 말하면서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적은 것은 ‘여성성’과 ‘여성시’에 대한 당대의 태만한 규정 안에 그를 가두지 않으려는 배려였겠으나 그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고통의 성별을 지우면 고통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받지 못한”이라는 표현은 여성의 생애에서 사랑의 비중을 과장하고 여자를 사랑의 객체로 주저앉히기를 원하는 어떤 이들의 편견과 엮여 있지 않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 표현 속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급진적 허무주의자의 자리에서 너무 솔직해 오히려 듣기 불편한 말을 토해낸 한 여성을, 유신시대에서 세기말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회가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했다는 뜻을 집어넣고 싶다. 최승자의 시에 표현된 고통은 1970~90년대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면서 여성들이 경험한 고통의 한 유형을 대표할지도 모른다. 그의 고통이 수많은 독자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그 지지가 한 시인의 사적 삶까지 구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그의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가 나왔으므로 나는 그의 예전 시집 일곱 권을 다시 넘겨보았고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가 그의 가장 훌륭한 시집이라는 희미한 과거의 판단을 재확인했다. 이 시집이 특히 뛰어난 것은, 모진 말이지만, 그가 다른 어느 시집보다도 바로 이 시집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모든 시집을 놓고 봐도 드문 것에 속하는, 생에 대한 순순한 긍정의 표현처럼 보이는 문장이 바로 이 시집 속에 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자주 인용되는) 구절의 출처가 바로 이곳이다.
‘20년 후에, 지(芝)에게’라는 제목이 알려주는 바는 이 시의 수신자가 ‘지’(芝)이고, 이 시가 그 ‘지’의 20년 후를 생각하며 혹은 ‘지’가 20년 후에 읽어주기를 바라며 쓰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가 누구인지 시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나이와 성별은 추정해볼 수 있다. 내용상 20년 후에나 성인이 되는 존재이므로, ‘지’는 당시 막 태어났거나 아직 유아(幼兒)였을 것이다. 그리고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80년대 초반에 지(芝)라는 글자를 이름의 끝 글자로 썼다면 아마 여자아이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최승자 시인에게는 아이가 없으니, 그렇다면 ‘지’는 시인의 조카이거나 친구의 딸이지 않았을까.
비관적 허무주의자인 시인은 어린 소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우선 어린 생명체가 세계와 처음 대면하는 날들을 지켜보며 경탄한다. 아이가 보는 세계는 경이롭다. 세계 그 자체가 본래 경이롭다기보다는 세계를 경이롭게 볼 줄 아는 아이의 눈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다. 그런 아이를 보며 시인은 바로 그 문장을 적는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비록 깨어지기 쉬운 아름다움이지만 삶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훗날 아이가 자라면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에 출근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아이에게 주어진 삶은 아름답기만 해야 마땅하다는 것.
앞에서 최승자답지 않게 ‘생에 대한 순순한 긍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이라고 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저 구절 속에 담겨 있는 희미한 회한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삶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는데 자신은 어째선지 그리되지가 않았으며 앞으로도 끝내 그럴 것 같다는 안타까움. 당시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시인은 자신에게 남은 것이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뿐이라고 단언한다. 그 예정된 결론을 바꿀 수는 없으며 다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연출하느냐 하는 일만이 그가 관심을 쏟음직한 유일한 일이라는 말과 함께(“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
이 시의 긴장이 거기서 나온다. 어린 ‘지’에게 생에의 찬가(讚歌)를 들려주고 싶지만 삶의 진실은 비가(悲歌) 쪽에 있다는 생각 말이다. 시인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개입해 들어온 세상의 적대적 힘이 ‘지’를 비껴가기를 바라면서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시인은 20년 후의 ‘지’를 생각하며 이 시를 부친다. 그때 나는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을 것이고, 너는 울면서 길을 찾아 헤매다가 “모든 끝의 시작”에 이르러 이 편지를 읽게 되리라고. 이 편지는 실제의 ‘지’에게 무사히 도착했을까.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생의 어느 국면에서 문득 최승자의 편지를 받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자신의 예견과는 달리 “21세기의 어느 하오”가 왔을 때 시인 최승자는 무덤 속에 있지 않았지만 대신 정신병원에 있어야만 했다. 진실과 허위를 분별하는 감각이 예민하고 그 둘의 뒤섞임을 못 견디는 이에게는 살아있음 자체가 항구적인 정신적 투쟁일 것이다. 그 투쟁이 2000년대 초반 이후 그를 정신분열증으로 이끌어 갔으리라. 입원 중이었던 2010년 당시의 어느 인터뷰에서 몸무게 34㎏의 그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을 할 때 그는 이번 생의 승자처럼 보였다. 재작년에 퇴원한 시인의 건강을 빈다. 부디 그의 가까운 곳에, 그를 다정히 안아주는 사람들이 많기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44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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