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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 신형철

by 오직~ 2016. 10. 10.

욥의 마지막 말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
힘이 세신 주님께서 힘이 없는 나를 핍박하십니다.
나를 들어 올려서 바람에 날리게 하시며
태풍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끝내 나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만나는
그 죽음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 몸을 치십니까?
기껏 하나님의 자비나 빌어야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이 몸을
어찌하여 그렇게 세게 치십니까?

 

고난 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쳤구나.
빛을 바랐더니 어둠이 밀어닥쳤다.
근심과 고통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햇빛도 비치지 않는 그늘진 곳으로만 침울하게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면
도와달라고 애걸이나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제 이리의 형제가 되고 타조의 친구가 되어 버렸는가?
내가 내 목소리를 들어 보아도 내 목소리는 구슬프고 외롭다.
살갗은 검게 타서 벗겨지고
뼈는 열을 받아서 타버렸다.
수금 소리는 통곡으로 바뀌고
피리 소리는 애곡으로 바뀌었다.

 

*<욥기> 30장 20~31절 (대한성서공회 편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을 따랐고 지면 사정에 맞게 행갈이를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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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시다.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구약성경은 고대 히브리 민중이 창작한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갖지만, 특히 <욥기>는 구약성경 중에서 ‘시가서’로 분류되는 작품 중 하나로 대부분이 운문으로 씌어 있는, 말 그대로 시다. (민음사에서 새로 출간중인 세계시인선에 <욥기>가 포함돼 있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어 사용자가 한국어판 <욥기>를 읽고 이 작품의 문학성을 표현의 층위에서 실감하기는 어렵다. <욥기>가 여전히 위대한 것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그 끈질긴 깊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 질문은 ‘무죄한 인간의 고통’에 관한 것이다.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 받는가? 그러므로 신은 없거나, 있어도 무능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의문과 울분 속에서 자주 무너져 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왜 죄 없는 학생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야 하고, 왜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균제를 들이마시며 죽어가야 하는가. 욥이 유사한 질문을 던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이다. 욥의 충심을 테스트해보자는 사탄의 제안에 응해 신은 욥에게 두 단계의 재앙을 내린다. 열 명의 자식이 모두 죽었어도 욥은 통곡하며 순종했다. 그러나 저주 받은 육체가 발진으로 뒤덮이자 유리 조각으로 온몸을 긁으며 욥은 절규한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찾아온다. 세 친구의 산만한 중언부언은 두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 하느님은 죄 없는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즉, 너에게도 죄가 있음에 틀림없다). 둘째, 비록 죄인이라도 신께 복종하면 용서받는다(그러니 불경스러운 저항을 중단하라). 예나 지금이나 가장 천박한 수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원시적 인과론에 기대 타인의 고통을 신의 응징이라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데 친구라는 이들의 말이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해 욥은 첫 번째 명제는 바로 자신의 사례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두 번째 명제와 관련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가보겠다고 답한다. 욥의 저항은 태만한 신앙인들과 부조리한 신 모두를 향해 있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은 세 친구와의 논전이 모두 끝나고 이루어지는 욥의 최후진술(27~31장) 중에 나온다. 전반부에서 욥은 신을 향해 직접 말한다. “주님께서는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 절대자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바람에 흩날리다가 태풍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티끌처럼 묘사돼 있다. 후반부에서 욥은 보이지 않는 배심원들을 향해 신의 직무 수행이 공정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이 작품의 다른 대목(24장)에서도 악한 자를 제때 응징하지 않고 그들의 부귀영화를 방조하는 신의 직무유기를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욥은 선을 추구해온 제 삶의 이력을 조목조목 복기하며 신의 업무 착오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항변한다.

 

친구들의 감정 없는 훈계에 욥이 전혀 설득되지 않자 논전을 지켜보던 청년 엘리후가 새로운 논객으로 등장하여 일갈한다. 당신이 감히 신과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태도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으니 절대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위치를 겸허히 자각하라고, 또 신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불평하지만 신은 언제나 말하고 있는데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며 바로 당신의 고통 자체에 신의 전언이 담겨 있다고 말이다. 친구들은 처벌이자 결론으로서의 고통에 대해서만 말했고, 엘리후는 전언이자 과정으로서의 고통에 대해서도 말했다. 확실히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게도 역시 눈앞의 고통에 감응하기보다는 신을 정당화하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

 

엘리후의 말이 끝나자 신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은 엘리후가 예상한 대로 한낱 인간과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 없다. 여기서 그는 질문하는 주체이지 대답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미처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욥이 ‘알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다. 그것으로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다시 확증하고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수차례 강조하여 결국 욥의 굴복을 이끌어낸다. 침묵하던 욥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이렇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42장 5~6절)

 

죄 없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고 이에 저항하는 인간을 굴복시켜 결국 다시 자신을 인정하게 만드는 이 가학적인 신의 잔인한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슬라보이 지제크는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신의 일방적인 발언을 이렇게 냉소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신의 말 때문에 욥의 침묵, 욥의 묵묵부답이 더욱 잘 들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평결한다. “신은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 않다. 다만 무능할 뿐이다.” 그는 <욥기>가 욥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실패했다고, 그러므로 <욥기>로부터 욥의 위대한 질문을 분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욥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는 그저 신이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렸고 그리되었으니 됐다는 듯이 행동한다. 왜일까. 나는 신학자가 아니어서 신학적 정답을 알지 못하며 다만 침묵할 때의 욥의 마음을 겨우 짐작해 볼 따름이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확률(우연)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 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 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근래 수백 명의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갑자기 독실한 신앙인이 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36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