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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귀신이 흐느낀다-서대경, 나의 시를 말한다

by 오직~ 2016. 2. 16.

 

 

http://goo.gl/CiNSK9

 

 

 

가을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잔에 술을 채우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어디서 난 원숭이냐고 물었다 「구역질이 나서 토했더니 이 녀석이 나왔네」 나는 잘게 자른 오징어 조각을 원숭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여운 짐승이군. 자네도 알다시피 그놈은 자네의 억압된 무의식의 외화된 형체일세」 「그렇겠지」 우리는 오징어 조각을 물어뜯고 있는 원숭이의 작은 주둥이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저 이빨 좀 보게. 그리고 저 피처럼 붉은 눈을 보게. 겁먹은 듯 보이지만 저놈의 본성은 교활하고 잔인하지」 내게 술을 따르던 사내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물론 자네를 공격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닐세」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원숭이를 품에 안은 채 낙엽 깔린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밤하늘은 맑고 차가웠다 그것은 자꾸만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고통스럽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삭였다 「슬프고 고통스럽니?」 「응」 품속에서 원숭이의 힘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를 부인하고 너를 저주했지. 너를 때리고 너를 목 졸랐다. 하지만 넌 너 자신이 나의 억압된 무의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응」 「너는 죽고 싶니?」 「죽고 싶어」 「하지만 넌 나의 환상일 뿐이야」 「죽고 싶어」 나는 천천히 품속에서 온몸이 오그라든 채 떨고 있는 그것을 꺼냈다 그것의 짧은 잿빛 털 위로 가을의 가늘고 메마른 달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너는 누구니?」 「죽고 싶어」 작고 투명한 핏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 서대경, 나의 시를 말한다 = 내 안에서 귀신이 흐느낀다

 

어느 가을밤 나는 우습게도 동네 피시방에서 이 시를 썼다.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열린 창으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천장 형광등에는 날벌레가 부딪고 있었다. 내 안의 원숭이가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화장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고 그러는 동안 삶에 대한 어떤 알 수 없는 기쁨과 쓸쓸함을 느꼈다.

 

무언가가 창가를 스쳐가는 소리가 났다. 달빛이었다. 창밖으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것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나의 그림자이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였다. 나는 몸을 돌려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돌아와 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는 첫 문장을 쓰고 나자 그 다음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금세 한 편의 시가 완성되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실내는 뿌연 담배연기로 가득했고 내 주위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든 사람들,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 속의 적에게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서 속으로 이 모든 것이 나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실내의 뿌연 연기, 침침한 모니터 불빛, 창밖의 그림자, 가을밤의 대기, 게임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내게 한 편의 엉뚱한 시를 쓰게 만든 알 수 없는 허공의 숨결, 이 모든 것이 나이고, 이 도시가 나이며, 이 순간이 바로 나라고. 나는 가방을 메고 가게를 나섰다.

 

시 속의 ‘나’처럼 나는 밝은 달빛 속을 걷고 있었다. 내 곁에서 그림자가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림자는 달빛 아래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길을 잃기 좋은 밤이었다. 이름을 잊고, 주소를 잊고, 갈 곳을 잊고, 달빛 속에서 숨죽여 웃기에도 좋은 밤이었다. 시를 쓸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외부를, 나를 영원히 헤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또한 자유롭게 하는 어떤 근원적인 외부를 홀연 응시하게 하는 밤.

 

그렇다, 우리의 내면이란 사실 외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지하며, 근원적인 의미에서 나의 욕망도, 나의 의식도, 나의 언어도 온전히 나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나에게 영원한 타자(他者)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바로 타자로서의 나를 응시하는 이러한 순간이다. 내 안의 원숭이는 내 안에서 신음하는 세계이며, 내 안에서 흐느끼는 귀신이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리하여 문득 자신의 이름을 잊고, 주소를 잊고, 갈 곳마저 잊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완고한 자아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의 굉음을, 가을밤의 달빛에 깃든 삶의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미로 속에서 미로가 되어 떠돌 때, 예기치 않은 부동성(不動性)을 내 안에서 감각하게 된다. 나는 타자가 된다. 그리고 타자는 세계가 된다. 시(詩)의 경험이란 그것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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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속에 쏟아진 ‘또 다른 나’

 

아무런 이유나 필연성 없이, 그냥 거기 존재할 뿐인 사물은 구토를 유발한다.(사르트르, ‘구토’) 사물의 본질을 응시하는 순간 드러나는 것은 “무질서한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의 나체, “헐벗은, 무섭고 추잡한 나체”인 까닭이다. 존재는 우발적인 것이며, 사유와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나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남긴다.

 

서대경은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구토를 유사하면서도 다르게 변주한다. 그는 구토 속에서 ‘나’의 밖으로 쏟아진 ‘또 다른 나’들에 주목한다. 원숭이거나, 귀신이거나, 공장 굴뚝이거나 기타 등등인 구토의 내용물은 ‘나’의 외부성과 타자성, 취약성을 이미지화한다. ‘나’의 내부에는 낯선 것들, 내가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 ‘나’는 나 아닌 것(부정), 나를 넘어서는 것(초과, 잉여), 나와 어긋나는 것(간극, 결핍) 들의 불안정하고 기이한 혼합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질적인 나-타자들이 모여 ‘나’를 이룩한다. 밖으로 벌어진 채 타자와 더불어, 타자의 타자로서 외존(外存)하며 수시로 변하는 정체불명의 ‘나’를.

 

서대경은 달리면서 소멸하는 “철도의 밤”과 “불 꺼진 공장지대”의 알레고리를 통해 존재의 내용물이 ‘짐승’과 ‘유령’으로 화한 자본의 제국의 비참을 그린다. 존재의 내·외적 상황이 야만과 헛것이 된 세계에서 서대경은 ‘나’라는 존재의 실상을 끝까지 직시하기 위해 분투한다. 내 안의 타자를 만나는 것은 황홀과 혐오, 고양과 전락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다.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극과 극의 대상이 하나임을 확인하는 일일 수도 있다.

 

서대경의 요점은 이렇다. 아무리 비루하고 척박한 조건에서도 존재는 존재하기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존재들이 함께 내는 불협화음인 “존재의 굉음”은 지금-여기-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의 투쟁을, 삶을, 본질이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증거한다. 그러니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든 외면하지 말자. 원숭이든, 백치든, 처음 보는 생물체든. 이 직시의 처절한 노력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아마도 유일하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