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황소보다 강한 ...조영선의 시 '산제비'

by 오직~ 2016. 2. 16.

 

 

http://goo.gl/P7ozqM

 

 

 

 

산제비   -조영관

 

저무는 들녘
파도가 쓸어간 갯벌에 해가 빠진다
짚을 태우는 연기 하늘하늘
자기 꼬리를 자를 듯 치솟는 새
하 날아오르는 것에는 발자국이 없네

땀방울이 스며든 마늘 밭 도랑물이
돌돌돌 길을 내고
둑새풀 우거진 거친 들판
텅 빈 쌀독같이 짙은 어둠을 찢고
날아오르는 하 저것은

따스한 처마 밑
포근한 잠이
자유가 그리운 그대여
꿈틀거리는 것에 시작이 있는가
강은 항상 끝나는 순간에 다시 바다로 열린다

삶이란 깨진 유리를 밟는 것처럼 아슬한 것이거늘
하루의 허기진 노동을 끝내고
촉촉하게 젖은 얼굴로 뒤돌아보는 어깨 위
지그시 새 날개처럼 덮어오는 들녘의 어둠
혓바닥이 간지러워
겨드랑이가 하 간지러워
귓속이 후끈하게
휘파람 소리를 내며 치솟는 새야

웅숭그리고 있던 잠에서 깨어
가슴에 불을 담고 뜀박질했던 날들
야만이 끝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야만이 길을 트는데
아무도 희망을 말하지 않아도
항상 처음처럼 들풀들은 자라나고
하늘 향해 길을 낸 버드나무를 바람이 흔들면
날카로운 삶의 흔적처럼
파들파들 떠는 사시나무 잎사귀에
둥지에
햇살이 걸리면
사금파리 같은 빛살이 희망을 쏘고
광야로 길을 떠난
발바닥이 뜨거워 잠들지 못하는
목이 말라
하 목이 말라서
우물 빛 하늘 때굴때굴 굴러가는 저 새야

 

 

 

폭력과 야만의 1980년대, 누구든 가슴에 불 몇 개쯤 달고 뛰던 시절이 있었다. 숱한 밤 불온한 꿈을 꾸며 이른 새벽 목장갑 먼지 털며 길을 나서던 때가 있었다. 한때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이 부끄러웠다는 이름 없는 시인이 있었다. 고 조영관. 현실의 완강함에 비추어 더 급한 것이 있었기에 시를 쓰는 그때가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출판사 일월서각을 그만두고 야만의 시대에 뛰어들었다. 1987년 부평공단 낚싯대 만드는 회사에 노조를 세웠다가 구사대 폭력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일용직 용접 배관 노동자로 평생을 살았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일용직 노동자, 요즈음 말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았다.

 

있지도 않았던 잔치는 끝났다고 서둘러 사람들이 짐을 챙겨 떠나고 아무도 희망을 노래하지 않을 때, 식어버린 꿈들을 다독이고 노동자의 일거리, 임금, 해고 등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생활공동체, ‘햇살 공동체’를 꿈꿨다. 절망과 회의의 시대에도 ‘아무도 희망을 말하지 않아도/ 항상 처음처럼 들풀들은 자라나’는 세상을 모색했다. 시인은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내가 쓰는 글이 땀을 흘리는 것보다 정녕 부끄럽지 않다면 시는 황소보다 강하고, 장갑차보다 힘이 세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가 한손에 용접봉을, 다른 한손에 다시 시를 잡은 이유다.

 

목숨그릇이 작았던지 시인은 50살을 몇 달 남긴 2007년 2월20일 간암으로 ‘세상 밖으로’ 떠났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시인이 병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은 유고시집이 되어버린 <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실천문학)다. 병고로 인해 서툴고 마저 다듬지 못한 노래도 많지만 한 시대 ‘여전히 정말’ 불온한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함성이고 유언이었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고인이 된 시인이 또 있다. 노동자 출신 시인 박영근. <취업 공고판 앞에서> 등 많은 노동 시집을 냈다. 그는 시인보다 9개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48살. 시인은 박영근 추모글에서 ‘대학 3학년 말 내 나이 스물 여섯인가 일곱에 만났으니 모질게 이어온 인연이다. 영근이로 인해 내 인생은 변했고, 딱 영근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출판사에서 노동현장으로 삶의 터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곡기를 끊고 며칠씩 술에 의지하면서 죽어가는 박영근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며,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한다. 업을 놓지 못하는 시인의 운명에 서로 얼굴을 비벼대면서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산제비’는 2000년 <노나메기> 창간호에 실린 시다. 야만의 시대를 건너온 시인이 강이 끝나더라도 바다로 열리고, 유리를 밟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삶이라도 항상 처음처럼 들풀들은 자라난다는 깨달음을 읊은 시다. 시인이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참회와 노동을 끝낸 들녘의 어둠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였다.

 

그에게 노동과 시는 신앙이었다. 그런 그가 좋았고 한편 그런 시인이 애처롭기만 하였다. 비록 짧은 생을 살다가 갔지만 지금도 생전에 좋아하는 노래 ‘장산곶 마루에~’ 하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나타날 것만 같다. 한밤 꿈처럼, 한 자락 바람처럼 이름 없이 스러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의 형, 조영관이다.

 

조영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