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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15년 11-12월

by 오직~ 2015. 12. 29.

- 해방 70년, 전후 70년에 생각하는 일본문제

 

'해방'이라는 것은 1945년 8월에 한반도가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2003년 5월에 미국의 부시 정권이 온 세계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 침략전쟁을 개시.

 

오다 선생은 모름지기 하늘을 나는 새의 눈(조감)이 아니라 땅을 기는 벌레의 눈(충감)이야말로 평화를 지키고, 대다수 평범한 인간의 삶의 진실을 옹호•대변하는 데 불가결한 시각임을 강조했습니다.

 

 

- 되돌아보는 베트남전쟁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에 32만 5,000여 명의 병력을 파병.

한국군은 80여 차례에 걸쳐 9,000여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

베트남 특수로 한국이 벌어들인 외화는 20~50억 달러로 추산된다. 1965년 한국의 수출 1억 7,500만 달러, 1970년 8억 3,500만 달러애 비하면 엄청난 액수이다.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은 1941년 5월 중국에서 호찌민 주도하에 배트민(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면서 본격화됐다.

 

2차대전으로 일본이 물러간 뒤 베트민은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식민지배를 복원하려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로 프랑스 식민세력을 몰아냈다.

베트민은 1955년부터 미국과의 전쟁을 벌였다.

 

결국 미국은 1973년 1월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정을 통해 베트남에서 발을 뺐다. 그로부터 2년여 후인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패망하면서 34년간의 베트남 독립 및 통일전쟁은 막을 내렸다.

 

1965~1973년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1,500만 톤(공습 800만 톤 + 지상 포격 700만 톤)의 불세례를 퍼부었다. 이는 히로시마 원폭의 700배에 해당되는 화력이다. 2차대전 중 일본에 투하한 폭탄(16만 톤)의 100배에 가깝고 6•25 당시 북한에 퍼부은 49만 5,000톤의 30배에 해당된다. 또한 2차대전 중 유럽과 아시아 전장에서 사용된 모든 화력의 3배에 이른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패배했는가? 한마디로 압도적 군사력만으로 다른 나라에 미국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오만함 때문이었다.

 

한국은 베트남을 몰랐다. 세계도 몰랐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란 미명 아래 베트남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저지하려 했다. 미국의 목표는 세계자본주의의 복원을 위한 동남아의 안정화였다. 일본경제의 회복을 위해서는 동남아의 정치적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였다. 둘 모두 중국을 봉쇄하고 일본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한국과 대만은 중대한 차이가 있다. 같은 반공국가이지만 대만의 장개석 정권은 항일세력이고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친일세력이라는 점이다. 1943년 중국의 대일 항전을 독려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전체를 중국에 증여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에 장개석은 "인도차이나는 결코 중국에 동화되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대만은 베트남전쟁이 반공성전이 아니라 민족해방전쟁임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나는 베트남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정치•군사•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에요."

 

 

- 스스로의 삶에 정직하라

 

생명농법 : 생산함과 동시에 잘 보살피며, 땅과 작물이 모두 좋은 방향으로 개량될 수 있는 사랑에 기반한 농법

 

생명농업은 무언가를 얻게 하지도 잃게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들이 변형 가능하고 서로에게 보완이 되어 순환합니다.

 

단순히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성장 혹은 검박한 생활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도덕규범을 지키는 것이며 적절한 가치에 기반한 조화롭고 충족된 삶입니다. 검소함은 무엇보다 인간 태도의 정중함이나 아름다움이에요. 내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입니다.

 

 

- 왜 '주빌리은행'이 태어났는가

 

금융기관은 보통 돈을 빌려주고 고객이 오랫동안 갚지 못하면 손실로 처리하고, 그 채권을 대부업체들에게 채무 원금의 1~10% 수준에 넘긴다. 이렇게 부실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대부업체는 채무자들에게 원금에 가까운 돈을 갚으라며 괴롭힌다.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비영리시민단체 '주빌리은행'이 탄생했다. '주빌리은행'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원금의 3~5% 가격으로 구입해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줄 목적으로 2015년 8월 출범했다.

 

빚 땡처리란 금융사들이 3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 채권을 오래 갖고 있지 않고 제3의 기관에 매각하는 것을 말한다. 금융사들은 정부 당국의 건전성 관리지침에 따라 부실채권 비율을 일정한 수준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부실채권 비율이 높아지면 그만큼 건전성이 악화 되었다고 판단한 금융감독 당국의 제재를 당한다. 따라서 금융회사들은 해마다 부실채권을 금융감독 당국이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에 맞춰 정리한다. 정리하는 방식은 회계장부에서 빼버린 뒤 매각하거나 특수채권으로 추심회사에 빚독촉을 위탁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신용대출 채권들이 대부업체에 팔리고 있고, 추심회사에 빚독촉이 위탁되면서 채무자들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특히 대부업체에 넘겨질 때 부실채권은 할인되어 팔리는데, 채무 원금의 5% 전후로 팔리고 있다.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문제는 매우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이다. 하물며 채권ㆍ채무 관계가 금융회사와 개인의 경우처럼 힘의 불균형이 분명하고 채무자가 절대적으로 상환능력이 없는 상황일 때 채무자를 죄인시하는 것은 폭력이다.

 

채무자가 사회에 끼친 해악보다 금융사가 일으킨 사고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부실채권이란 무엇인가? 채무자들에게 복지나 일자리를 주는 대신 빚만 권한 결과 그 빚을 갚지 못해 발생한 채권이다. 그리고 은행의 회계장부상 건전성 지표만 맞추기 위해 채권을 여기저기 쉽게 내다 팔도록 허용하는 것이 금융감독 당국의 부실한 감독 내용이다. 금융거래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삶은 금융감독의 관심 대상도 못 되고 있다. 왜 금융감독이 필요한지 본질부터 망각하고 감독시스템을 유지하느라 투입되는 세금만 낭비하고 있다. 금융감독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금융으로 인해 삶이 망가지거나 안전한 사회질서가 흔들리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가혹한 현실의 주범이 금융사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하는 연체자를 죄인 취급하는 채권자의 신념을 우리 스스로 내면화해버린다.

주빌리은행은 채권시장의 엽기적인 행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국민들이 '채권자의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돕는 운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덕허덕 빚을 갚으며 언제 어느 때 연체자가 될지 모를 위험한 세상에서 우리는 금융사가 아니라 연체자와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내가 빚을 어렵게 갚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금융자본이 원하는 채무노예의 의식이다. 우리는 금융시민으로서의 시민 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금융은 복지와 일자리를 대신한 빚을 권하는 금융이 아니다.

복지와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금융은 철저히 차단되어야 한다. 금융은 실제로 고금리 장사이지 복지나 사회안전망의 수단이 아니다.

 

만약 취약계층에 속하는 사람이 사보험에 가입하게 되면 공공의료서비스는 제한된다.

 

금융시민 의식은 바로 금융이 모든 사람에게 접근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치 않겠다는 데서 시작된다.

 

빚은 반드시 갚는 것이 아니다. 채권보다 인권이 중요하다. 사람을 노예화하는 금융의 위험성과 무책임성을 인식하고 알리고 그것에 대해서 함께 행동하게 만드는 것, 이것을 위해 주빌리은행은 태어났다.

 

 

- 새로은 상상, '장발장은행'

 

벌금 분할 납부, 벌금형 집행유예 도입, 일수 벌금제, 사회 내 노역 등 네 가지 대책만으로도 벌금제의 폐해, 매년 4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교도소에 끌려가는 비극은 말끔하게 바로잡을 수 있다.

 

 

- 문제는 '자존감'이다

 

심층심리학은 선택된 것이 선택되지 못한 것을 억압한다고 말한다. 선택된 것이 의식이고 선택당하지 못한 것이 무의식일 것이다. 그런데 의식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산업자본주의에도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면, 그 의식은 시장일 것이고 무의식은 인간일 것이다. 근대성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것이다. 근대의 의식은 이성이고 무의식은 감정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시장-이성'이 지속적으로, 또 압도적으로 '인간-감정'을 억압해왔다. 자존감에 대한 관심이 이 완강한 지배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혼란스런 시대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 가치를 분명히 아는 강인한 자기(self)가 필요하다. 문화적 합의는 무너졌고 중요한 역할모델은 찾아볼 수 없다. 공적 헌신을 고취하는 일도 드물고 오래도록 변함없던 삶의 특징들은 급변한다. 자기자신을 모르거나 불신하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시대이다. 외부에서 안정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자기 내면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힘든 시대이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도무지 나의 것 같지 않은 불편한 감정이 있다. 수치심, 무기력, 우울, 고독, 불안, 공포, 열등감... 우리의 주요 거주지는 자신의 감정이다. 하지만 내 안의 감정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 예측할 수 없는 감정(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람자'와 직결되는 감정')을 지휘 통솔하는 관제탑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에 굴복당한다. 매번 감정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감정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성의 힘으로 멱살을 잡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은 채.

 

홀로 서야 더불어 설 수 있다.

감정의 관제탑이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에 대한 확신'인 동시에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자기 정신에 대한 신뢰는 감정과 사유를 넘어 자신을 행동으로 이끄는 힘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자존감은 자율적 실천이다.

 

 

 

 

 

☆ 녹색평론 2015 11-12월

    -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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