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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럼 내린 통폭탄이 파리 비극 불렀다 - 박기용

by 오직~ 2015. 11. 2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718433.html

 

 

 

 

 

 

시리아, 폭격의 악순환

▶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폭격의 역사>(한겨레출판·2003)를 통해 전쟁 상황의 폭격은 인종주의와 대량 학살을 내재하고 의도한 것이라 했다. 대량 학살을 의도한 무자비한 폭격은 민간의 희생을 수반한다. 폭격의 주체는 으레 이 불가피한 희생을 알려 하지 않는다. 의도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참화는 악의 악순환을 부른다. 프랑스 파리 테러와 이슬람국가, 시리아 내전, 이라크 전쟁은 이 고리에 엮인 사슬이다. 무차별 살상무기인 ‘통폭탄’으로 자국민을 학살한 시리아 아사드 정권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전쟁의 무참한 본질에 가장 가까운 공격 형태는 폭격(공습)이다. 가해자를 최소한으로 드러낸 채 상대에게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참화를 안기는 공격. 전쟁의 역사에서 폭격은 폭력과 악의 끊임없는 순환을 불렀다.

 

1940년 5월10일,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총리가 된다. 바로 다음날인 5월11일 처칠은 독일 폭격 명령을 내린다. 목표물은 일단 군사시설이다. 하나 군사적 목표물은 오로지 순수한 군사시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통신이나 수송 같은 군사적이면서 산업적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시설물도 포함된다. 기차역이나 교량, 통신사 같은 곳도 군사적이면서 산업적이다.

 

‘순수한 군사적 목표물’은 통상 민간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산업시설들은 그렇지 않다. 폭격엔 민간인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초기 군사적 목표물만을 대상으로 했던 영국의 독일 폭격도 점차 대상을 확대했다.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처칠은 “목표물 지역 주변 민간인들은 전쟁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다”며 사실상 무차별 폭격을 허용한다. 이후 영국 폭격기사령부는 독일 도시에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으로 공격한 뒤 다시 그 불을 끄지 못하도록 폭탄 공격을 반복했다.

 

전쟁은 공격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잔악무도해진다. 영국이 독일을 폭격한 넉달 뒤인 1940년 9월 히틀러는 영국 도시들에 대한 대공습으로 대응했다. 이 대공습은 무려 반년 동안 지속되며 4만명의 영국 민간인 목숨을 앗아갔다. 1940년과 1941년에 걸친 독일의 런던 대공습은 공세, 기습공격을 뜻하는 영어 ‘블리츠’(blitz)만을 써서 ‘더 블리츠’(The Blitz)로 불린다. 공습의 대명사가 됐다.

 

전략적으로 이런 무차별적 공습이 의도하는 바는 ‘공포’다. 런던 대공습이 있기 3년 전 스페인 내전(1936~1939년) 기간에 일어난 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합법적 공격 목표로 삼은 20세기 야만주의의 극단이었다. 게르니카에선 불과 2시간30분 동안 이어진 무차별 폭격으로 1654명이 숨지고 889명이 다쳤다.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시민들에겐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럽고 참혹한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다가온다. 이런 강도의 공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속되면 시민들은 결국 이성을 잃는다. 살던 곳을 떠나거나, 떠날 수 없다면 스스로 나서 정부에 항복하라고 요구하거나, 폭동을 일으킨다. 무차별 폭격이 의도하는 바다.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폭격의 역사는 전쟁의 무자비함이 본격화된 역사다. 아무리 정밀폭탄으로 군사시설만을 폭격해도 민간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시설 주변에 사는 민간의 희생도 따른다. 최근 129명의 목숨을 앗아간 프랑스 파리 테러를 일으킨 이슬람국가(IS)의 탄생과 성장 과정엔 이 잔혹한 전쟁과 공습의 역사가 얽혀 있다.

 

공습, 가장 무참한 형태의 공격
2차대전 때 독일 폭격한 영국
독일은 반년간 4만명 폭격 살해
정밀폭탄도 민간희생은 불가피
IS 탄생·성장도 공습이 얽혔다

드럼통에 폭약과 함께 휘발유,
쇠붙이 조각 등 넣은 통폭탄
불 붙여 헬기에서 눈대중 투하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만행에
한 해 2천명 이상이 학살됐다

 

9월에만 최소 1715개의 통폭탄 투하

이슬람국가가 주요 근거지로 삼는 곳은 이라크와 시리아다. 이라크는 2003년 미국이 일으킨 전쟁 이후, 시리아는 2011년 이후 지속된 내전으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을 자초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은 ‘통폭탄’과 화학무기를 이용해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슬람국가는 이 학살의 피를 먹고 자랐다.

 

통폭탄은 드럼통 같은 곳에 폭약과 함께 휘발유, 쇠붙이 조각 등을 넣어 만든 재래식 폭탄이다. 별다른 유도장치 없이 불을 붙여 헬기에서 떨어뜨린다. 조준도 눈대중으로 한다. 불가피하게 다수의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시리아 정부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통폭탄은 이스라엘 군대가 1948년 건국과 함께 시작된 아랍연맹과의 전쟁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군도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에서 사용했고, 1990년대 들어 스리랑카와 크로아티아, 수단에서 쓰였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2012년 10월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에서 처음 통폭탄을 사용했다. 마구잡이로 쏟아붓는 통폭탄에 매년 20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아인권네트워크(SNHR)는 지난 9월에만 최소 1715개의 통폭탄이 투하됐다고 지난달 밝혔다. 시리아인권네트워크는 각지 활동가 등의 보고를 토대로 한 보고서에서 9월 한 달의 사망자가 103명으로, 이 가운데 어린이 25명, 여성 15명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지역별로는 시리아 남부 다르아(다라·데라)주에서 33명, 북부 알레포에서 29명, 홈스에서 22명, 수도인 다마스쿠스 교외에서 6명이 숨졌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해 2월 통폭탄 등 민간인에 대한 무력 사용 중지를 요구하는 결의안(2139호)을 채택했지만, 아사드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통폭탄을 민간인 거주지에 투하하고 있다.

 

통폭탄은 그야말로 무차별적으로 살포된다. 국제앰네스티 보고서를 인용한 영국 <비비시>(BBC)의 보도를 보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5월까지 시리아 알레포에서 통폭탄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3124명인데, 이 중 반군인 ‘자유시리아군’의 전투원은 1%에 불과한 35명뿐이었다.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비비시>와의 인터뷰에서 “통폭탄에 대해 알지 못하며, 처음 듣는 소리”라며 발뺌했지만, 시리아 민간인들은 정작 이슬람국가보다 정부군의 통폭탄을 더 무서워한다.

 

통폭탄은 아사드 정권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아사드 정권은 지금까지 5년 가까이 내전을 끌어왔고 혼란을 확산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시리아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인 자유시리아군은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사이 무정부 지대가 된 시리아로 이슬람국가가 세력을 확장했다. 국가가 사라진 통제 불능의 상황 속에서, 시리아는 이슬람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의 주요 공급처가 됐다. 이번 프랑스 파리 테러를 일으킨 테러범들 중 신원이 파악된 이들 다수가 시리아를 다녀온 전력이 있었다.

 

그 사람, 바샤르 아사드

대규모 난민 사태와 이슬람국가의 성장엔 시리아의 독재와 내전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시리아는 현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아사드가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지금까지 독재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아버지는 69살의 나이로 숨진 2000년까지 대통령이었고, 그 아들인 바샤르도 벌써 15년째 집권 중이다. 시리아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지만, 무제한 재선이 가능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통령을 연이었으니, 북한과 다를 바 없는 세습 독재체제다. 바샤르가 대통령이 되던 해 그의 나이는 34살이었는데, 헌법상 40살 이상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규정까지 고쳐가며 대통령이 됐다.

 

시리아는 1차 세계대전 뒤인 1920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위임통치령으로 삼고 1944년까지 지배했다. 현 대통령이 속한 아사드 가문은 이 시기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군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해 영향력을 키웠다. 아사드 가문이 속한 알라위파는 이슬람교 내 시아파의 분파인데, 시리아 전체 인구의 12% 정도에 불과하다. 인구의 80%에 이르는 이슬람 수니파를 통제하기 위해 프랑스는 분할통치 정책을 썼고, 알라위파에 힘을 실었다. 시리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뒤 군부를 장악한 알라위파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1971년 하페즈가 대통령이 된다. 하페즈는 수니파를 통제하기 위해 군대와 비밀경찰을 알라위파로 구성했다. 그는 1982년 3만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 ‘하마 대학살’을 저지르는 등 철권을 휘둘렀다.

 

하페즈에 이어 집권한 바샤르의 임기 초기 시리아인들은 희망을 품기도 했다. 바샤르는 억압적으로 통치한 아버지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바샤르 집권 뒤 ‘다마스쿠스의 봄’이라 불린 강렬한 사회적, 정치적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후계자 수업을 위해 시리아로 돌아오기 전 영국에서 안과의사로 수련 중이었던 바샤르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정보통신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이 막 보편화되기 시작한 1998년 시리아의 첫 웹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했다. 취임 직후 그는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아사드 가문의 기반인, 비밀경찰을 이용한 독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불어온 민주화의 바람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정권 교체로 이어졌지만, 시리아에선 내전의 계기가 됐다.

 

아사드 가문의 독재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는 2011년 1월부터 시리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3월18일 시리아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 정부는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시리아 남서부 도시 다르아의 소요가 가장 극적이었다. 3월20일엔 수천명이 다르아 거리로 쏟아져 나와 3일 동안 정부 조처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다. 이때 치안부대의 발포로 한 명이 숨지고 많은 이들이 다쳤다.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시위 진압을 하게 되면서 탱크가 주거지역에 포탄을 발사하고 군대가 민가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리아 정부의 조처는 자연스레 시리아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켰고, 전국적인 반정부 운동으로 확산했다. 반정부 세력들은 시리아 국가회의, 국가조정위원회, 자유시리아군 등으로 나뉘어 성장했고, 정권 핵심인사들의 이탈과 군인들의 탈영이 잇따랐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2012년 6월 국제사회는 시리아 상황을 내전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락까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의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는 통폭탄을 사용하는 아사드 정권에 대한 시리아인들의 반감을 먹고 자랐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알카에다의 이라크 조직에서 기원한 이슬람국가는 시리아 내전이 터지자 시리아 내에 ‘누스라전선’이란 이름의 조직을 만든다. 누스라전선은 이후 시리아 반군들 중 가장 전투력이 강한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친 영역을 포괄한 이슬람국가는 꾸준히 성장해 지난해 6월 스스로를 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영토는 영국에 버금가는 크기였고, 전체 7만~8만명에 이르는 병력이 1000만명가량의 주민을 장악했다. 아사드 정권의 학살에 노출된 시리아의 수니파 주민들에게 이슬람국가는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다. 이슬람국가도 이를 이용했다. 이슬람국가는 아사드 정권이 속한 알라위파와 시아파의 압제자들이 수니파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싸우게 했다. 얼마 전 시리아 내 온건 반군 일부가 누스라전선에 합류했다고 의회 청문회에서 밝힌 앤 패터슨 미국 국무부 중동담당 보좌관은 “몇몇 반군들이 부득이하게 누스라전선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5년에 가까운 내전 시기 동안 아사드 정권은 이슬람국가 못지않은 잔인한 방법으로 자국민을 살상했다. 통폭탄은 물론, 화학무기 등을 사용해 살해한 시리아인이 25만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아랍권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이 폭정을 저지른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의 제거보다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를 저지른 이슬람국가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지난 13일 파리 테러 뒤 ‘문명 세계’는 이슬람국가에 대한 공분으로 흥분해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번 테러는 전쟁 행위다. 프랑스는 야만과 싸워 승리할 것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나라 안과 밖에서 행동할 것”이라며 격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파리 테러는 문명 세계에 대한 공격”이라 했다. 프랑스는 핵항공모함인 샤를드골함을 파견했고, 연일 항공기를 출동시켜 시리아 내 이슬람국가의 근거지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폭탄은 신병 모집소나, 무기고, 훈련캠프 등 군사시설에도 떨어졌지만, 축구장이나 박물관, 의료시설에도 떨어졌다. 락까엔 22만명의 인구가 산다. 공습이 민간의 피해만 키우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아랍권 방송 <알자지라>는 지난 17일 락까 내 한 언론인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는 “락까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상황들을 버텨왔고, 이슬람국가의 독재에 공포스럽게 살아왔다. 세상은 우리가 이슬람국가의 통제와 하늘에서 이어지는 공습에 갇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분노에 찬 프랑스와 연합군의 공습은, 또 다른 악의 악순환을 불러올지 모른다. 영국의 공습이 독일의 런던 대공습을 부르고, 시리아 정부의 통폭탄이 이슬람국가의 성장을 도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