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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적인 폭력 - 문강형준

by 오직~ 2015. 9. 2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0515.html

 

 

 

 

미국에서 7년 동안 유학하면서 어떤 사람과도 나이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아 보이는 이들과도 언제나 스스럼없이 대했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되었던 폴은 나보다 20년은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우리는 그저 ‘친구’였다. 웃으며 인사하고, 각자의 일상을 나누고, 궁금한 건 서로 묻고, 도움이 필요하면 부탁했다. 나는 폴 앞에서 예의를 지켰고, 폴도 그랬다. 나이는 정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귀국한 지 1년이 되었지만 나이 많은 이와 그렇게 마음 편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폴 또래의 50~60대 남자들은 주로 ‘아저씨’라고 불리는데, 이 아저씨들이야말로 곳곳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있거나,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거나, 어깨를 부딪치고 말없이 당당히 가거나, 말을 나누는 순간 싸움이 생길 것만 같은 표정의 사람들. 슈퍼마켓에서 신용카드를 냈다고 구시렁대며 카드를 휙 던져 나와 말싸움을 벌였던 이도, 심야시간이라고 신호를 안 지키며 고속도로 달리듯 과속하는 바람에 그냥 내려야만 했던 택시의 운전기사도, 장례식장에 와서 슬픔을 표하는 대신 촌수를 내세우며 일장연설을 해서 나를 분노케 했던 이도 아저씨였다.

 

이런 아저씨들의 놀라운 당당함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는 것 같다. 남자이고, 나이가 많으며, 지위가 있다는 것, 이 세 가지가 그들을 ‘아줌마’와 구별 짓는다. 아줌마에겐 ‘나이’만 있지 아저씨에게 있는 다른 두 가지가 없다.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지만, 아줌마는 남들을 윽박지르거나 공격적이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남성 중심적이고 상하 위계적인 한국 사회의 추악한 본질을 내면화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보다 어리고, 지위가 낮고, 여자인 사람을 ‘맘대로’ 대하는 데 있어 어떤 성찰도 결여한다. 성별, 나이, 지위는 아저씨에게 있어 ‘힘’의 상징이다. 그는 가정과 직장과 국가의 가부장이다.

 

최근 작가 고종석이 여배우 에마 왓슨에게 쓴 공개편지와 <조선일보> 논설위원 김광일이 자신의 아들에게 쓴 공개편지 형식의 칼럼은 한국 사회 ‘아저씨’들의 면모를 정확히 보여준다. 다양한 곳에서 많은 활동을 하며 영향력을 떨치는 페미니스트 여배우에게 진부한 훈계를 던지는 고종석의 편지는 도대체 자신의 지식과 교양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 난 아저씨가 어떻게 상황과 맥락을 초월할 수 있는지, ‘늙는다는 건 벌이 아니다’며 박근혜 정부의 기만적인 노동정책을 고생 모르는 청년들에 대한 훈계로 물타기하는 김광일의 편지는 극우신문 논설위원 아저씨의 현실인식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보여준다. 이 두 ‘성공한’ 아저씨들과 거리에서 만나는 교양 없이 당당한 아저씨들 사이의 차이는 없다. 알량한 성별과 나이와 지위를 가지고 ‘어린 여자’와 ‘철없는 아들’에게 맘대로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아저씨들은 모두 하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에 등장하는 영조의 모습은 이 한국 아저씨들의 폭력적 성향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과 비극적 결말은 단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왕가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특수한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가 지키려는 가치를 벗어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단죄는 21세기 지금 여기 곳곳에서 반복되는 중이다. 성과 세대와 계급이라는 영역에서 힘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이들에 대해 가하는 ‘아저씨적인 폭력’은 한국 문화의 독특한 풍경이다. 서구의 68혁명은 기실 자신들의 ‘아저씨’를 처단한 약자들의 문화적 반란이었다. 뒤주에 갇혀 죽는 아들을 보며 우는 아버지에게 감동할 게 아니라, 그런 강력한 아저씨의 문화를 뒤엎을 문화적 반란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