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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방식 - 이계삼

by 오직~ 2013. 11. 12.

한전 본사에서 밀양 송전탑 현장으로 파견되었다는 ㄱ차장, 웬만한 주민들은 그를 안다. 어느 동네를 가도 욕을 듣고, 때로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누구를 만나도 빙글빙글 웃고, 깍듯하게 예를 차린다. 그는 나이 어린 나에게도 ‘전화 드리겠다’고 하지 않고 ‘전화 올리겠다’고 한다. 가끔은 궁금해진다. 저 사람은 무슨 맘으로 이런 일을 할까. 신념 때문일까? 비록 총알받이일지언정 나의 희생으로 한 폭 두 폭 전진하며 세워지는 이 송전선로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고 어쩌고저쩌고, 아마도 아닐 것이다. 신의 직장이라지만, 이 끈이 떨어지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치킨집을 열어야 할 것이므로, 그가 감당하는 이 처절한 감정노동은 결국 그에게는 생존의 문제일 것이다.

 

 

며칠 전, 레미콘 차량 진입을 막으려 대치하던 바드리 현장에서 본 장면이다. ‘할매, 괘안치예? 할매 시원하지예?’ 어색한 사투리 써 가며 손주며느리처럼 할매를 챙기는 이는 앳된 여경들이었다. 레미콘 차량이 들어오면 도로에 드러누울 기세였던 할매는 어느새 순한 양이 되었다. 여경은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아양을 떤다. “아이고, 우리 할매, 참 이뿌다. 젊을 때는 참말로 고왔을 끼다.” 할매가 힘겹게 세워 올렸을 의지의 발톱을 뽑아버린 착한 여경 셋은 다시 다른 할머니를 찾아가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목적을 잃어버린 할매는 가을볕 아래 넋을 놓고 앉아 있다. 그 앞으로 레미콘 차량이 또 한 대 지나간다.

 

 

밀양 송전탑 공사를 앞두고 정부의 고위 공무원 ㄴ씨를 두어 차례 만난 적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영리한 사람 같았다. 그는 내년 여름철 전력수급 상황이 걱정이라고, 그래서 신고리 3호기가 그때까지 가동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내가 물었다. 신고리 3호기 제어케이블이 재시험 중이지 않으냐, 내가 듣기로는 불합격할 가능성이 높다더라, 그러면 완공이 2년 넘게 밀린다던데, 그러면 밀양 송전탑 공사는 지금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정부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그는 즉답을 피했고, 그가 유창하게 읊어대던 레퍼토리는 내 예측대로 제어케이블 성능 시험 불합격으로 박살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이미 올 6월부터 불합격을 예상하고 미국 회사에 새로운 제품 성능테스트를 맡겨 놓았다는 사실, 거대한 사기를 당한 느낌이었다. 한수원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던 ㄴ씨는 몰랐을까? 국무총리도, 장관도, 한전 사장도 온 언론에다 대고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논리가 박살이 나도, 누구 하나 미안하다, 부끄럽다, 사과하는 이가 없고, 명분을 잃었지만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닥치고 있으라는 듯 오늘도 밀양 송전탑 공사는 질주한다.

 

 

다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먹고살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송전탑이 합의되면 마을 공동체는 분열의 후유증을 앓겠지만, ㄱ차장은 밀양을 떠날 것이다. 밀양 송전탑이 끝나면 아마도 ㄴ씨는 승진할 것이다. 저 여경들도 다른 현장에 투입되어 그렇게 재미나게 일할 것이다. 그런데,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이 일이 남은 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세상은 한마디로 ‘사냥꾼 사회’(지그문트 바우만), 사냥꾼 대열에 끼어 있지 않으면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사냥꾼으로 남기 위해 청년들은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공기업 입사 시험을, 여경 채용 시험을, 행정고시를 준비한다. 한전 직원들 앞에서 던지는 밀양 할매들의 일갈은 그래서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빌어물(먹을) 데가 엄써서 그런 데서 밥 빌어묵나? 고마, 때리 치아라! 여(여기)서 내캉 농사짓자, 고마.”

 

 

20131025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