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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내란음모’가 있는 나라 - 김동춘

by 오직~ 2013. 9. 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1792.html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 등을 내란음모죄로 수사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유신 시절과 광주 5·18을 겪은 나는 우선 움찔했다. 공포감을 추스르고 나니 ‘어이없음’과 짜증, 그리고 서글픔의 감정이 묘하게 겹쳐졌다. 나는 80년 김대중 내란음모보다는 71년 11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던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 떠올랐다. 대학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하숙집’에서 내란을 음모하다니… 정말 소도 웃을 일이지만, 그때는 그 무시무시한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멀쩡한 사람을 하루아침에 송장으로 만들던 시대니, 모두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가를 뒤집을 정도의 음모라면 적어도 그들이 만들었다는 아르오(RO·일명 산악회)가 내란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나 조직체계, 실행계획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고, 정말 권총 한 자루나 사제 폭탄 여러 개라도 준비한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상식적 질문을 던진다.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보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이들이 그런 준비를 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들과 같은 근본주의 민족해방론자들이 제도 정치권에 들어간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자기들끼리 모임에서 그런 ‘납득 안 되는’ 이야기도 했을 수 있다고 추측은 하지만, 그들이 무슨 내란을 모의할 힘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에 내란음모죄를 들고나온 국정원이나 이들의 먹잇감이 된 80년대식 ‘애국세력’을 보고 참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의 내란죄 소동이 천둥소리로 시작해서 모기 소리로 끝난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의 내란음모 사건이 야당과 온 저항세력, 그리고 온 국민을 움츠러뜨려 감히 정권 비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효과를 톡톡히 거둔 것도 너무 잘 보았기 때문에, 이번 국정원의 칼춤을 보고서 두려움보다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식민지 초기 일제의 이른바 105인 사건 내란죄 조작에서 80년대 김대중 내란죄까지 지난 세기, 권력이 만들어낸 내란죄에서 확인된 사실은 표적이 된 집단의 ‘내란음모’가 아니라 사실 권력자들의 위기였다. 형법에 의한 처벌이 횡행하는 나라는 아직 미개국가라는 사회학자 뒤르켐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내란음모’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국가와 사회는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며, 그 나라의 권력자들은 얼마나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못난 존재’들인가?

 

생각의 시계가 1970년대에 멈춰 있는 사람들이 이 정부 권력의 핵심에 들어갈 때 이런 일이 터지지 않을까 우려는 했다. 국정원은 이런 사건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우리는 국정원이 개혁되어야 할 더 강한 이유만 발견하게 되었다. 진보당 사람들이 수년 동안 그렇게 사찰당하고 발언이 녹취되었다면, 민주당은 물론이고 여당이나 국민 모두가 불법 사찰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자신들이 위기에 빠지면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칼을 빼들어 모든 다급한 국가적 의제, 특히 경제·사회적 의제는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건은 확실히 박정희 스타일, 아니 박정희가 전범으로 삼았던 조선총독부 스타일이다. ‘내란’, ‘국가안보’, ‘방공’, ‘방첩’의 20세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가 정말 짜증스럽고 또 슬프다. 이 수사는 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는 그들의 대선 불법 개입 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