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이웃의 속내를 맡는 후각…들뢰즈가 선물한 ‘소통의 기호’

by 오직~ 2013. 6. 5.

 

 

 

http://goo.gl/SYoAP

 

 

 

 

내 서재 속 고전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 외 옮김
민음사·1만5000원

 

‘나의 서재’라니. 그렇지만 사실 내게는 서재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물론 서가로 둘러싸인 방이 있기는 하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이나 자연과학 등 다른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서인지, 책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편이다. 간혹 엎드려 책을 보다가 책이 쏟아져 낭패를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그 방은 서재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서재(書齋)라는 말에 등장하는 재(齋)라는 글자는 정돈된 마음이나 경건한 분위기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약간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책들, 그리고 가끔 무너지는 책들이 있는 곳이 어떻게 서재일 수 있겠는가. 불쌍한 내 책들. 모두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서재의 구실을 하는 책꽂이가 하나 있기는 하다.

 

똑같은 책을 두 권 사는 경우가 있다. 책을 더럽게 보기에 생기는 불가피한 습관인 셈이다. 간지를 붙이고 형광펜으로 칠하고, 심지어는 여백에 메모를 하니까 더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다시 읽어야 할 정도로 좋은 책이 있다면, 나는 다시 한 권을 사서 책장 한켠에 소중하게 모셔둔다. 한마디로 말해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가방에 넣어 나와 함께 위기를 모면할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꼭지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자마자, 내 뇌리에는 그렇게 두 권씩 사도록 만든 책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 책들을 한권 한권 독자들에게 알려주자. 그러면 나와 함께 ‘내 서재…’ 꼭지를 집필하는 선생님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동일한 세계를 달리 표현하는
타자와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가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기호를 해석하도록 강제한다면
다행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우리는 기호를 기호인지 모르고
무감각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 처음 들어온 책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1925~95)의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이다.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다소 허풍스러운 미셸 푸코(1926~84)의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그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라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수십 혹은 수백 년 흘러야 그 진상이 이해될 수 있는 지금을 이 영민한 철학자만큼 명료하게 파악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들뢰즈의 사유를 독해하기 어려운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복잡하고 난해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시금석과도 같은 책, 그것이 바로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다. 위대한 모든 책이 그런 것처럼 이 책도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들뢰즈는 자신의 인문 정신이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어떤 면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라는 대작에서 프루스트는 말했던 적이 있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이든 아니면 동시대의 예술가이든,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동일한 세계를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하고 표현한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핵심 개념 ‘차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지만, 그것을 그만큼 다르게 표현하는 데는 젬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이 경험하는 방식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를 일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부모와 유사해 보여도 우리는 부모와 다르게 느끼고 경험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쌍둥이라도 이것은 예외가 없는 원칙이다. 그래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삶과 경험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모든 독창적인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미술가, 작곡가 등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축복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를 엿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인문학과 예술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만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힘든 일인가. 위대한 작품을 독해하여 그 작가의 내면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기형도의 시를 통해 요절한 그의 속내를 이해한다는 것,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여린 작가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현대 문명을 진단하는 영화감독의 시선을 맛본다는 것,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그의 울분에 공명한다는 것,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그의 고독을 맛보는 것.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위대한 작가들은 항상 난해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해묵은 편견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들은 정말 우리가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일까. 그들은 정말 우리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려는 농간으로 어려운 작품을 남겼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이다. 우리 자신과는 다르게 경험한 것을 위대한 작가들은 제대로 표현했기에, 최소한 우리에게는 그들의 속내를 맛볼 수 있는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 사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문제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세계를 경험하지만, 불행히도 위대한 작가들처럼 제대로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내와 경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소통하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마치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해서 울고만 있는 갓난아이와 관계하는 것처럼 너무나 곤란하고 당혹스럽기만 한 일이다. 갓난아이를 생각해보자. 몸에 열이 나서 우는지, 배가 고파서 우는지, 침구가 불편해서 우는지, 어머니의 설거지하는 소리에 놀라서 우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갓난아이는 어느 경우든 울음으로만 자신의 속내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 이웃들의 사정도 이런 갓난아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위대한 작가들은 어렵고 평범한 이웃들은 쉽다는 생각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 사정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진지한 노력으로 위대한 작가들의 속내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지만, 우리 이웃들의 속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삶은 항상 상호 오해로 점철되고, 소통해야 할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이웃들의 부족한 표현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집중력을 통해 그들의 속내를 읽는 데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행동이든 말이든 그들이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면, 거기에는 그들만의 경험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프루스트를 다룬 책의 제목에 ‘프루스트’라는 단어 이외에 ‘기호들’이란 개념을 덧붙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바로 기호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등장하는 말이다. 그렇다. 갓난아이의 울음, 아내의 서글픈 웃음,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애인의 손가락, 벤치에서 멀뚱히 하늘을 보는 노인의 허허로움 등등. 모든 것이 그들의 속내로 들어갈 수 있는 기호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기호로서 우리로 하여금 해석하도록 강제한다면 그래도 이 경우는 다행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왜냐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런 기호들을 기호인지도 모르고 무감각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가 드러난다. 위대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들의 속내를 읽는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호를 기호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목을 조를 수가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타인의 목을 조르려면, 우리는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글자만으로 시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앞에 생생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에 무감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것이 많은 책들 중 <프루스트와 기호들>이 내 눈에 띄었던 이유일 것이다. ‘프루스트’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을 통해 우리 이웃들이 내뿜는 ‘기호들’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들뢰즈가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로 불리게 된 진정한 이유가 아닐지.

 

강신주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