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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철학은 창시자의 자기고백, 자기기록이다. / 정희진

by 오직~ 2012. 9. 22.

‘일인종사’(一人從事)하는 성격이 아니라 수시로 열광의 대상이 바뀌긴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홍콩의 두치펑(두기봉)이고 사상가는 미셸 푸코다. 그의 영화는 고문 중 숨쉬기 같은 삶을 직면케 하고, 푸코는 이 직면의 공포를 덜어준다. 이들의 작업은 추구가 아니라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서 괴로운 현재를 짧게 느끼게 해준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것이다.

 

니체까지, 이 세 텍스트의 공통점은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거 일색이다. 좋은 말로 ‘나쁜’ 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근데, 그게 위안이 된다. “심오한 사상가는 오해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두려워한다.”(234쪽) 나는 심오하지도 않고 사상가도 아니므로 당연히 오해가 두렵지만, 오해받을 때 위로가 된다는 자세다.

 

<선악을 넘어서>(1886)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으로 니체 사상 전반을 보여주는 주요 저작이다. 영어권 최고의 니체 해석자 발터 카우프만의 편역본(1965년)을 청하출판사가 기획 번역(1982년)한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오랜 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100쪽),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104쪽)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글귀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다.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서양 철학을 니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사람은 니체 자신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의하는 ‘팔로어’들이 늘고 있다. 니체의 위대함은, 철학이 플라톤 시대부터 순수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하고(니체의 표현) 이에 상반되는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해왔던 기존 인식론의 전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즉, 대립적 사고에 필요한 개념인 원인, 결과, 상호성, 숫자, 법칙, 자유, 목적 등은 인간이 만든 것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이를 논리랍시고 제멋대로 투사하는 인간의 ‘강한’(강조는 니체) 의지와 ‘약한’ 의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그가 선악 개념 없이 존재하기 힘든 도덕과 윤리학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이 책의 목적은 선악을 제목 그대로 건너지 못할 강기슭, 피안(彼岸)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지와 무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세련된 것이 지다.”(49쪽)

 

그는 철학을 일종의 격세유전으로 보았다.(43쪽) 이 글귀의 문맥은 철학이 대대로 유유상종, 같은 자장(磁場)안에 있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인데, 나는 달리 해석해본다. 격세유전은 유전의 반대어에 가깝다. 세대를 건너뛰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과 돌연변이를 설명한다. 원조는 없다. 불연속, 무작위, 이질성…. 니체의 이 키워드는 푸코, 사르트르, 들뢰즈, 지멜 등 후대의 ‘위대한 철학자’(이 책에서 니체는 이 표현을 자주 쓴다)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카우프만이 아쉬워할 만큼 경박하고 졸렬한 여성에 대한 묘사(실은 매우 웃기다)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도 적지 않은 통찰을 제공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위대한 철학은 창시자의 자기고백이며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자기기록이다.” 철학은 ‘알고자 하는 충동’(강조는 니체)이 아니라 철학자의 가족, 돈벌이, 정치에 대한 관심사에서 시작된다.(29~30쪽) 지식은 근본적으로 자전적 회고록에 불과하다. 사상의 싹은 철학자의 도덕적 혹은 부도덕적인 의도에서 배양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개념인 ‘초인’ ‘영웅도덕’ ‘귀족주의’(가족이 아니라 능력에 의한)가 등장하지만, 이 문장은 개인의 생각을 신, 역사, 진리(과학, 국민…)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경고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캐서린 매키넌은 보편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페미니즘은 무전제의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는 청중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청중은 없기 때문이다.”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훈 옮김, 청하, 1982

 

 

20120922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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