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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길

전북 고창 가평·유점마을…같은 전통 다르게 지켜

by 오직~ 2011. 5. 26.

내세워 자랑하거나 조심조심 감추거나

 

 

» 전북 고창군 신림면 덕화리 유점마을.

‘갱정유도’를 따르는, 전통 옷차림의 주민이 마을길을 걷고 있다.

 

전북 고창 가평·유점마을…같은 전통 다르게 지켜

“아무리 문명이란 것이 발달히어도 인간 본성을 지켜야 안 쓰것소. 말하자믄 요것이 전통이랑게.”(유점마을 배태진씨·61) “그랑게 하늘당산나무 없으면 우린 쓰러져부러야. 당산나무를 섬기는 것이 우리 마을 전통이지라.”(가평마을 고복상씨·71)

 

과거와 오늘, 내일을 이어주는 것이 전통이다. 잘 이어받아도 어쩔 수 없이 바뀌고 소멸해가는 경우가 많다. 케케묵고 고루해서 더 반짝이는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살아가는 두 마을을 찾아간다. 전북 고창군 신림면, 상투 틀고 갓 쓰고 사는 유점마을과, 옛 돌담과 집들이 고색창연한 가평마을이다.

 

 

가평리 가평마을 | 돌담길 가득, 한학 전통 지켜 뜨거운 교육열

신림면 방장산(743m) 자락이다. 우선 마을에 오래된 돌담 골목(사진 아래)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담쟁이 덮이고 이끼 낀 돌담이 이리 돌고 저리 꺾이며 이어진다. 전체 돌담 골목은 약 1.5㎞. 이 돌담이 끌어안고 있는 집들은 대부분 고색창연한 흙벽집들이다. 거친 황토벽에 낡은 나무기둥, 반질반질한 대청마루에서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골격만큼은 한 100년씩들 된 집들”이다. 농촌전통테마마을 추진위원장 고복상씨는 “마을길 전부가 돌담이었는디, 새마을사업 함시로 일부를 쎄멘으로 발라 개조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을 하나로 묶는 핵심 상징물이 마을 당산나무다. 가평리엔 수령 400~500년을 헤아린다는 커다란 팽나무가 세 그루 있다. 두 그루는 마을 안에, 한 그루는 논가에 솟았는데, 이 중 두 그루가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당산목이다. 해마다 정월 초이틀 또는 초사흗날 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린다. 먼저 논가의 천룡당산나무(할아버지나무)에 제사 지내고 마을 쪽 할머니나무에 지낸다. 마을회관 ‘할머니방’에 모이신 어르신 10여명에게서 마을 당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법도가 물러졌지. 당산나무 지삿날 여자는 꼼짝두 모뎠어. 온 마을에 금줄 치고 오도가도 모뎌.”(행산댁 이복순씨·85) “내 개팽이에 시집와 75년을 사는디, 봉게로 남정네들이 장두 보구 괴기 사구, 떡두 하구 다 해. 지사 땐 비린 건 입에 안 대. 몸에 이도 안 잡구.”(호동댁 김봉녀씨·90) “정월 대보름엔 긴 동아줄을 나무에 입혀서니, 돼야지두 잡구 왼 동네를 한바퀴 돌구 난리가 나부리지라.”(수성댁 이기순씨·83)

 

멋진 거목들은 67년 역사를 가진 가평초등학교 운동장 가에도 있다. 폭포수 같은 바람을 쏟아내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팽나무 20여그루가 짙은 그늘을 거느리고 늘어서 있다. 그늘이 너무 좋아 다른 학교에서 소풍을 올 정도라고 한다. “마을의 서쪽을 보하는 비보림”이다. 전교생 19명에 선생님 8명인 작은 학교다.

 

 

 

 

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한학을 숭상하는 전통과 교육열이다. “여가 말하자믄 유학이 성한 디요. 유교적 전통과 한학을 숭상허고, 옛것을 중히 여기는 마을이라.”(고복상씨) 마을엔 구한말 한학자이자 항일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과 그의 제자인 이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고석진·고용진·고예진 선생 네 분을 모신 사당 도동사가 있다. 1928년 세운 사당으로, 해마다 5월5일 제를 올린다. 가평마을은 최근 30여년 사이에 무려 18명의 박사를 배출한 ‘박사 마을’이다. 고씨·유씨·기씨 등 70여가구 140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서 의학·수학·경제학·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박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평마을을 둘러볼 때, 철마다 주민들이 벌이는 농산물 수확 등 농촌체험 행사와 함께한다면 한결 보람있는 여행길이 될 듯하다. 6월엔 복분자 따기, 술·음료 담그기, 시골밥상 산채체험 등을 진행한다. 체험장이나 민박집에서 묵을 수도 있다. 1박 1인 1만원, 식사 5000원.

 

 

덕화리 유점마을 | 갱정유도 형제들, 어디보다 외부 노출 꺼려

가평마을에서 약 3㎞ 거리에 있는 덕화리 유점마을은 이른바 ‘도인마을’ 중 하나다. 상투 틀고 망건 쓰고, 흰 한옷 입고, 경 읽고 일하며 살아간다. 16가구 중 8가구 20여명이 유학을 숭상하는 토속종교 ‘갱정유도’(更定儒道)를 믿는 ‘형제’들이다. 갱정유도는 일제강점기 말 강대성(1890~1954)이 창시한 신흥종교. 하동 청학동, 남원, 부안 변산, 공주 등에 갱정유도를 신봉하는 크고 작은 도인마을이 형성돼 있다. “전통은 지키되 공자왈 맹자왈만 가지고는 세상을 바꾸지 못헌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요.”(주민 남정홍씨·50)

 
유점마을은 여느 도인마을과 달리 외부 노출을 꺼린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반기지도 않고, 자세히 알려지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한 집 마당에 들어서자, 머리를 길게 땋은 청년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사진 찍지 마세요.”

 

도인마을의 좌장 격인 배태진(사진)씨를, 그의 허름한 흙벽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그랑게 현재는, 말하자믄 우리가 수양이 덜 된 상태지라. 나 자신도 공부하는 중인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것는가.” 배씨는 ‘지리산 청학동’처럼 상업화하고 관광지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수양이 모지래면 요것이 점점 병이 되아가지고, 민박 허고 밥 팔고 서당 팔고 해서 그르치게 되는 것이요.” 그러나 언젠가는 세상에 문을 열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 최종 목표는 사회로 나아가 공헌허고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요. 혼자 잘 먹고 잘 살라믄 사회가 무슨 소용이것소.”

 

마을 풍경은 여느 산골마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소박하고 낡고 허름한 집들 안팎을 들여다보면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결혼 전의 남녀는 머리를 길게 땋은 한옷 차림으로 서당에 다니며 기초 한문과 한글, 수학 등을 배운다. 자라면 갱정유도의 경전인 <부응경>을 가르친다. 그러나 최근엔 서당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아 “일부 청소년을 청학동으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도인들은 벼농사와 복분자·고추 농사를 짓고, 옷과 망건·갓 등은 직접 만들어 쓴다. 갱정유도인들이 절대금물로 삼는 2가지가 있다. 흡연과 개고기다. “담배는 정신건강을 해치고, 개는 추물이어서 먹지 않는다.”

 

유점마을에 갱정유도인들이 깃들여 산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니다. 20여년 전 전남 여천에 살던 배씨 일가가 들어와 수양하며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주변의 왕림리·도산리·아산리 등에도 20여가구 40여명의 신도들이 모여 산다. 유점마을은 본디 유기(놋쇠)점이 있던 데서 비롯한 이름인데, 몇년 전 마을회의를 열어 한자 이름을 ‘유점’(儒点)으로 고쳤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온 지 15년 됐다는 남정홍씨가 작별인사를 하며 말했다. “우리는 제2청학동의 길을 걷지 말자. 이게 우리 마을 사람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노출을 꺼리지만 방문객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둘러보며 주민과 인사 나누고 돌아간다면 굳이 막지 않는 분위기다. 사진 촬영과 흡연은 조심해야 한다.

 

고창=글·사진 이병학 기자

 

■ 여행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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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길 | 호남고속도로 내장산나들목~입암 쪽 우회전~다시 우회전~747번 지방도~입암 천원사거리~밤고개~신림면 도림리 네거리 좌회전~가평마을. 유점마을은 가평마을 못미처 덕화리에서 팻말 보고 좌회전해 2.4km 들어가면 된다. 서해안고속도 고창나들목~정읍 쪽 좌회전~세곡삼거리 우회전~708번 지방도~왕림네거리 우회전~가평마을.

 

◎ 먹을곳 | 바닷가 뻘밭 가두리에서 사료 없이 기른 장어로 이름난 고창읍 용궁회관(063-562-6464)의 장어구이(1인분 2만2000원·사진), 복분자 즙을 넣어 반죽한 냉면을 내는 태흥갈비(063-564-2223), 전주식 콩나물국밥의 ‘콩나물해장국’집(063-564-0304).

 

◎ 주변 볼거리 |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 보리밭(6월 초까지), 고창읍 매산리·죽림리 일대의 고인돌 무리(세계문화유산)와 고인돌박물관, 고창읍성,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오베이골 생태습지(운곡습지) 탐방로, 선운사 등.

 

◎ 여행문의 |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063)560-2457, 고인돌박물관 (063)560-2715, 가평마을 체험관 (063)561-5149.

 

 

 

 

20110526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