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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길

영주 구성공원과 서천

by 오직~ 2011. 6. 5.

물길 바뀌어도 60년 전 거리 그대로

 

 

» 영주 옛 관아 건물의 하나인 영훈정. 영주시의회 옆에 있다. 중앙 관리를 맞이하고 배웅하는 장소로 쓰였다.

 

 

경북 영주 시의회~옛가옥거리~구성공원~문화의 거리 7km

소백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낙동강 상류 물길이 경북 영주시 서쪽을 지난다. 서천이다. 서천 물길은 영주 시내에서 두 차례 자리를 옮겼다. 한번은 “용이 옮기고”, 한번은 사람이 옮겼다. 영주 도심은 물길이 옮겨간 자리를 따라 발달해 왔다. 영주의 주산인 철탄산 자락과 시내 한복판 구성산 주변에 영주 옛 거리와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주초등학교(옛 영주관아 터) 옆에서 걷기 시작해, 낡아가는 영주동 옛 거리를 거쳐 옛 물길, 새 물길 둘러보며 시계 반대방향으로 시내를 한바퀴 돈다.

영주시의회 앞 주차장(옛 등기소 자리)에 차를 대고 커다란 회나무 그늘로 든다. 영주초등학교 주변은 조선시대 관아 터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짓느라 헐어내고 옮겨 지었다. 영주시의회 옆에 영훈정①이 있다. 중앙의 관리들을 맞고 배웅하던 정자다.

 

일제 신사가 있었다는, 철탄산(276m) 자락 신사골 들머리로 오른다. 선계동이라는 서민 동네다. 골목길을 따라 어린이들의 다양한 표정을 담은 벽그림②이 눈부시다. 2010년 가을 시민·대학생들로 꾸려진 자원봉사자들이 ‘동네방네 희망 그리기 작업’을 벌였다. 신사골은 6·25 때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들이닥쳐 주민들을 총살시켰다는 골짜기다.

 

풍국정미소, 책상·주판 등 집기까지 문화재감

숫골 들머리를 거쳐 영주제일교회(1958년 지은 석조건물)를 보고 1950~60년대 거리 모습이 남은 큰길로 내려선다. “돈이 없으니께네 집도 옳게 몬 짓고”(제일슈퍼 주인), “개발이 안 돼노이 옛날 그 모냥 그대로래서”(협동이발관 주인), “영화 찍는다꼬 고마 온 데서 다 찾아오는”(송재승 해설사) 낡은 거리다. 미륵암·동백분식 간판을 단, 옛날식 입원실 모습이 그대로 남은, 옛 영주기독병원③ 건물로 들어서자 한 아주머니가 반겼다. “사글세 방 볼라꼬예. 방 두칸이 보증금 없이 열달에 백오십만원이라예.”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 풍국정미소④다. 건물과 시설, 사무실 책상·의자·저울·주판 등 집기들까지 고색창연한 문화재감이다. 45년 전 큰아버지로부터 정미소를 물려받았다는 우길언(73)씨는 “물량이 줄어 2년 전 운영을 멈췄지만, 보리방아도 밀방아도 고마 스위찌 딱 여문 기계 하난 지대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관사골로 오르며 “억수로 오래된 한옥”인 옛 조광양조장(현 무궁화제분소) 주인 집이라는 낡은 한옥⑤과, 방치된 일제 강점기 영주역 역무원 관사⑥들을 보고 내려와 고려말 세워진 효자비를 만난다. 부친을 극진히 봉양하는 한편, 왜적까지 토벌한 문재도 선생에게 공민왕이 하사(1374년)했다는 ‘평해군사 효자 재도 비각⑦’이다.

 

영주 중앙시장 자리엔 옛 영주역사(1941~1973년)가 있었다. 시장 입구 팔각정(역마정) 앞에 ‘옛 영주역 터⑧’ 표석이 있다. ‘쓰리세븐 열쇠점’ 옆길이 역으로 드는 대로였고, 시장 안 ‘의류1번가’ 자리가 역 앞 광장이었다. 옛 고추시장⑨으로 간다. 뒷골목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옛 상가건물들이 가득 차 있다. 한때 경북 북부 고추 집산지로 이름을 날렸던 고추시장이다.

 

‘선비골 전통시장⑩’으로 들어간다. 어물전, 채소전 거쳐 순대골목이 이어진다. ‘문화의 거리’ 옆으로 나가 구성공원(구성산성)으로 향한다. 조계종 포교당 지나 계단을 오르면 6개의 선정비⑪가 나타난다. 조선말 영주 지역 군수를 지낸 민치록(명성황후의 친부)을 기리는 비(고 군수 여성부원군 민공위치록 유애비)도 있다.

 

울창한 숲길 지나면, 1922년 옮겨 세운 옛 관아 문루 ‘가학루⑫’가 모습을 드러낸다. 2층 누를 받친 12개의 굽고 휜 자연목 기둥들이 춤춘다. 앞쪽 ‘가학루’ 현판은 구한말, 일제 강점기의 명필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다. 2층 누에 오르니 사면으로 돌아가며 무수한 시판들이 걸렸는데, 마룻바닥엔 술병과 담배꽁초가 무수하다.

 

국민교육헌장 빗돌을 지나 산을 내려와 반구정(伴鷗亭)⑬을 만난다. 고려말 김해군수 권정이 고려 멸망 소식을 듣고 고향 안동 임하에 세웠던 정자를, 후손들이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고려를 회복한다’는 뜻의 ‘반구정’(返舊亭)이라 쓰기도 한다. 구성산 밑 절벽을 따라 봉송대 정자가 있는 동구대 쪽으로 걷는다. 바위엔 ‘봉송대⑭’ 등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서천 물길은 50년 전까지 이곳, 구성산 서쪽으로 흘렀다. 1961년 7월 사라호 태풍 때 대홍수로 영주시내가 물에 휩쓸리자, 1962년 물길을 지금 위치로 새로 뚫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던 박정희 소장이 이곳을 찾아 서천 직강공사 착공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구성산 서쪽 물길도 애초엔 산 동쪽으로 흘렀다고 전해온다. ‘휴천동’이란 지명이 이를 드러낸다. 용들이 승천을 앞두고 싸울 때 한쪽 용을 도운 대가로 용이 산 서쪽으로 물길을 돌려줬다는 얘기가 전한다. 일제 강점기 구성산 동쪽 옛 물길 따라 중앙선 철로가 놓였고, 서쪽 물길이 지금 위치로 옮겨간 뒤엔 철로도 서쪽 물길 자리로 옮겼다.(1973년)

 

33년 매운 쫄면 맛 지켜온 중앙분식

봉송대(동구대) 옆 ‘권씨 부실 강씨 정려각⑮’과 최근 세운 사복재 권정 신도비 거쳐, 여말선초에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 등 세명의 판서가 났다는 ‘삼판서 고택’ 옛터를 어림해 본다. 구성로 48-3, 48-4 주택 부근이라고 한다. 박찬극 영주문화원장이 말했다. “구성산과 고택 터를 보믄 거북이가 알 씰는(낳는) 형국이라.” 고택은 대홍수 때 무너져 철거하고, 2008년 서천 새 물길 옆에 복원했다. ‘계심대’ 등 조선시대 각석이 있다는 절벽 밑은 메워져 텃밭이 되고 토끼장이 들어서 있다. 물이 흐를 때 동구대는 강 건너 서구대와 함께 절경을 이뤘다고 한다.

 

 

 

 

 

철길 지나 서천 둔치로 간다. 커다란 미루나무 두 그루가 거센 강바람에 물소리를 쏟아낸다. 식당 겸 카페 가람솔 옆 언덕으로 오르니, ‘직선으로 정비된’ 서천 물줄기가 내려다보인다. 관아 건물의 하나였던 제민루(16), 삼판서 고택(17) 등 복원된 건물 지나 영주공공도서관 마당으로 들어선다. 통일신라 중기의 ‘영주리 석불입상(18)’(보물 60호)과 오층석탑이 기다린다. 모두 일제 강점기 휴천동 논가에서 발견됐다. 옆엔 일제 강점기 233명에 이르는 항일의병들의 투쟁 실적을, 전국을 돌며 수집해 <기려수필>을 지은 ‘기려자’ 송상도 추모비(19)가 있다.

 

다시 철길 지나 시내로 들어선다. 전선을 땅에 묻고, 분수대·물길까지 조성해 깔끔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문화의 거리(20)’를 걷는다. ‘영주의 명동’으로 불리는 번화가다. 여기서부터 출발점인 영주시의회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맛집 탐방 코스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명동돈가스(옛 삼화다방), 31년 됐다는 빵집 태극당과 50년 된 함흥면옥을 들여다보고, 25년째 한우 갈빗살만 다뤄온다는 중앙식육식당 거쳐 중앙분식(21)으로 간다.

 

흥미로운 곳이 33년간 쫄면 한가지만 해온다는 중앙분식이다. “타지로 유학 간 처녀도, 시집간 새댁도, 배가 남산만해진 임신부도, 고향에 오면 가장 먼저 달려가 먹는다”는 매운 쫄면이다. 맵지 않은 ‘간쫄’(간장쫄면)도 인기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막바지 거리는 참기름·들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기름방’들이 모여 있다. 약 7㎞를 걸었다.

 

영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20110602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