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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길

강릉 도심

by 오직~ 2011. 3. 17.

관아 객사문~곶감거리~임당동 성당 5km

옛읍성 골목마다 오래 묵은 볼거리

 

강릉은 강원 동해안의 중심도시. 산(대관령·소금강)과 바다(경포해변·경포호·주문진·정동진) 경치가 두루 아름답고, 큰 인물들(신사임당·이율곡·허균·허난설헌)의 발자취도 널린 고장이다. 차포 떼고, 강릉 옛 도심에 희미하게 남은 소소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찾아 걷는다. 대부분의 우리 도시가 그렇듯이, 강릉 중심부에도 일제강점기 흔적이 덕지덕지하다.

 

강릉 관아 객사문 (임영관삼문·국보 51호)에서 시작한다. 케이티와 한국방송 쪽으로 오르는 길이다. 고려 태조 때(936년) 처음 지어졌다는 객사를 비롯한 관아 터는 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 일제가 관아를 횡단하는 도로를 내고 객사 건물을 학교로 사용했다. 관아 건물들은 당시 다 헐리고 객사문과 동헌인 칠사당만 남았다.

 

객사문은 고려 말 건립된,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건축물로선 도내 유일의 국보 문화재다. 일부 배흘림 기둥과 대들보 등은 낡고 닳은 옛것 그대로다. 임영관 현판(사진)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낙산사 행차 때 썼다고 전해온다. ‘임영’은 강릉의 별칭이다.


» 강릉 임당동 성당. 1955년 지은 건물로 최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말 사육장이었다는 우체국 지나 관아 정문으로 들어가 옛 강릉부사가 집무하던 동헌 칠사당을 만난다. 호구·농사·병무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베푸는 곳이라 해서 칠사당이다. 1870년 중수한 건물. 요즘은 단오제 때 쓸 신주를 빚는 장소로 쓰인다. 칠사당 뒤 언덕 위에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었으나, 일제는 이곳에 신사를 세웠었다. 객사문 네거리 길 건너 농협 앞엔 관아 군기청·작청 터 표석이 있다.

 

제일은행 옆 골목으로 들어가, 문연 지 54년 됐다는 청탑다방으로 간다. 낡은 문짝 열고 들어서니 어르신들이 가득하다. 50년대 말 개업했다는 다방으로, 건물도 간판도 내부장식도 거의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61년부터 이 다방 단골이라는 엄성만(87) 어르신은 “옛날부터 나이 든 분들이 들러 쉬고 가던 노인 사랑방”이라며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들르는 필수 코스가 돼 ‘강릉 정치1번지’로도 불린다”고 소개했다. 17년 전 다방을 인수했다는 전영자씨는 “하루 서너번씩 들르시는 어르신도 많다”고 전했다. 전씨는 아침이면 싸래기죽과 달걀을 무료 서비스하고 수시로 군고구마 등도 대접한다. 어르신 커피 1000원, 젊은이는 2000원.

 

 

 

 

 

 

 

 

 

 

 

 

객사문은 강원도 최고 목조건물이자 국보

 

선거 유세도 하고 시위도 하는 장소라는 ‘택시 차부 광장’을 건너다보며, 낡아가고 쇠퇴해가는 가구점거리로 들어간다. 강릉읍성 남문이 있던 거리로, 대부분 오래된 건물을 단장해 농·책상·액자 등을 판다. 강릉읍성은 고려 말~조선 초에 축성된 이래 1800년대 말까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40년째 얼큰한 손칼국수(장칼국수)를 내는 용비집을 지나, 30년 동안 액자를 만들어 왔다는 낡은 목공소(일제 때 도정공장 건물)를 보고 18년째 손칼국수를 낸다는 남문칼국수집을 만난다. 겹처마를 낸 2층집 남문칼국수집은 일제 때 지어진 집 그대로라고 한다.


» 옛 한옥을 식당으로 쓰는 벌집칼국수.

골목을 나서 큰길 건너면 강릉의료원이다. 옛 강원도립병원 자리로, 1919년 4월4일 농민들이 남대천 보 공사를 위해 모였다가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장소다. 도로변에 이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남대천 둑길로 올라서 남산교 쪽으로 걷는다. 물길 건너편에 보이는 아담한 산이 남산이다.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남산 꼭대기엔 1927년 지은 정자 오성정이 있다. 일제가 객사를 허물 당시 ‘정묘생 계원’들이 목재와 기와 일부를 사들여 세운 정자다. 남산 밑 남대천 둔치는 단오제(6월) 때 주행사장이 된다.

 

남산교 북단 굴다리 지나 옛 동명극장(현 동명골프연습장) 골목으로 든다. 일제강점기 요정골목에서부터 광복 뒤 이른바 ‘니나노 골목’으로 바뀌어오는 동안 수많은 술꾼들이 돈을 쏟아붓던 거리라고 한다. 영세한 술집들이 남은 낡은 건물과 고궁·한성관(옛 기원)·옛날집 등 한정식 식당들이 그 흔적이다. ‘중화당 대약포’란 글씨가 돋을새김된 2층 건물(옛날집)을 보고, 저팔계콧구멍·방앗간곱창구이 등 돼지고기 구이집들 지나 곶감골목으로 나온다.

 

80년대 초반까지 삼베·곶감 상점이 밀집해 있던, 120년 역사를 지닌 ‘곶감전’이다. 부친에 이어 60년째 가업으로 곶감·삼베 가게를 해온다는 선일상회 변성구(44)씨가 말했다. “장날이면 곶감 ‘미수꾸리’ 일꾼(곶감 담는 가마니 짜는 사람)만 40~50명이 몰려 먹고살던 데예요. 여기가.” 곶감거리 일대는 80년대 초까지 ‘강릉 1번지’로 불리던 중심상가였다. 지금은 선일상회 등 두 집만 남아 강릉 곶감거리의 명맥을 이어간다.

 

성남시장·중앙시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건어물·생선·잡곡·의류·채소가게들이 뒤섞인 골목이다. 중앙시장 상가건물 2층으로 오른다. 40년 된 해성횟집 등 얼큰한 ‘삼숙이매운탕’으로 잘 알려진 식당이 두어곳 있다. 삼수기·삼식이로도 불리는 삼숙이(본명 삼세기)는 곰치·도치처럼 ‘못생겨도 맛은 좋은’ 바닷고기의 하나다. 삼숙이탕 8000원.

 

술꾼 돈 쏟아붓던 골목엔 낡은 건물뿐


» 오규환 가옥 마당의 명자나무 가지에 돋은 붉은 꽃망울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상가건물 반대편 출구로 내려가, 길 건너 철교 옆에서 거대한 은행나무를 만난다. 한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았다 살려주자 은행알을 물어다줘 심었다는 나무(수컷)다. 수령이 1000년이라지만 과장된 느낌이다. 은행나무 뒤쪽엔 조선 중기에 처음 짓고 고종 때(1867년) 화재 뒤 다시 지은, 별당식 건물 보진당이 있다. 안동 권씨 문중 자제들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한다.

 

다시 철길 건너와 비좁지만 정겨운 먹자골목(사진)으로 들어선다. 메밀부침·전병·감자전·올챙이국수·감자옹심이칼국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장 보러온 아주머니들도, 친구 만난 어르신들도 앉고 서서 메밀전 찢고 막걸리잔을 기울인다. 신영극장 앞을 지난다. 유동인구가 많아 방송 날씨 보도 때 단골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장소이자, 변두리로 가는 노선버스 대부분이 거친다는 중심거리다.

 

옷집·빵집·액세서리집·공짜폰 가게들이 즐비한 ‘대학로’로 들어선다. 대학교 앞이 아니라,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몰린다 해서 대학로다. 쌍쌍의 청춘들을 뒤로하고 큰길 건너 중앙동주민센터 앞길을 걷는다. 토요일 오후엔 차량통행이 금지돼,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지는 ‘문화의 거리’다. “침 잘 놓는다”는 한의원 지나 우회전해 ‘오규환 가옥’을 보러 간다. 정면 3칸·옆면 2칸짜리 강릉시내 유일의 초가다. 조선 후기 건물. 새단장한 모습에다 안팎에 온갖 살림살이들이 쌓여 있어 옛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당의 명자나무는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써 가지마다 붉은 꽃망울들을 내밀었다.


» 먹자골목

임당동 길을 걸어가다 왼쪽 골목(복개천) 안에서 낡은 한옥(벌집칼국수)과, 20여년 전까지 강릉에서 명성을 날렸다는 옛 명주병원 건물을 보고 나와 네거리로 간다. 출발점이었던 객사를 둘러싼 돌담이 내려다보인다. 네거리 모퉁이에서 화사한 모습의 성당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1955년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임당동 성당(등록문화재)이다. 웅장한 맛은 없으나 세련되고 화사한 멋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성당 네거리 건너편 용강동 일대는 일제 때 일본인 600여가구가 모여 살며 상권을 형성했다는 곳이다. 객사 뒤 선관위 옆골목 안에서 일본식 가옥 흔적이 남은 집들을 볼 수 있다. 1963년 지은 건물에서 45년 동안 한의원을 열어온 동원한의원 지나 한국은행 앞으로 간다. 한국은행 자리는 조선 말 포도청의 병기와 군수품을 보관하던 창고인 군기고가 있던 곳이다. 길 모퉁이에 이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약 5㎞를 걸었다.

 

20110317한겨레 이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