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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쌍화점 _ 유하

by 오직~ 2009. 1. 9.

 

 

“쌍화점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몽고인이 내 손목을 잡습니다. (…) 삼장사에 불공을 드리려고 갔더니 사주(寺主)가 내 손목을 잡습니다. (…)”

노래 <쌍화점>을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젊은 왕이다. 왕이 공식 연회에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거문고를 뜯으며 부르는 것이다. 그 공식 연회란, 원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후사를 잇지 못하였기에, 그 후사를 축원하는 자리이다. 왕의 노래에 맞추어 뭇신하들은 취기를 발산하며 어수선한 춤을 춘다.



속국의 왕은 이미 왕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에서 어떤 일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면서 ‘왕’이라는 호칭을 가진 자는 외롭고 두렵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자리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 상징을 취하려는 자들이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왕을 다시 죽이려고 한다. 그 위협에 대해 대항하려는 왕의 행위는 마침내 ‘광기’로 해석되고, 그 해석된 바에 의해 왕은 광증을 휘두른다. 그리고 광증은 ‘사랑’이라는 지점에서 폭발한다.



왕은 동성애자이다. 왕이 억압하지 않는 단 하나가 어쩌면 자신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왕이지만 왕의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사람,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자신의 모든 욕망은 차단되어야만 하였는데, 다만 그의 성애만은 사적(私的)인 영역에서 고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왕이 만든 '건룡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한 자구책이었지만 거기서 발견한 ‘홍림’에게서 왕은 자신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왕후를 맞이하지만, 그녀와 합궁하지 못하고, 대신 홍림의 몸을 ‘빌리려’ 했던 것이, 홍림의 온몸이 왕후에게로 미끄러지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아 버린다. 결국 왕은 연인을 옆에 두기 위해 연인을 거세시키는 일까지도 감행해야 할 만큼, 사랑에서도 역항(逆航)을 할 수밖에 없다. 왕에게는 모든 것이 불화로 치닫는 것이다.

왕은 자신이 사랑했지만,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 홍림을 두고 ‘미욱한 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 전체에서 가장 미욱한 자는 아마도 왕일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너무 높아서 떨어질 수조차 없는 그 좁은 자리에서 왕은 연인에게 직설적은 언사로 명령하지도 못한다. 왕은 언제나 우회적으로 그의 연인과, 연인의 연인이자 자신의 아내이자 대국의 공주이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자의 여동생인 왕후를 절망적으로 탓한다. 차라리 왕후의 말대로, 왕후와 홍림은 도망이라도 가서 함께 살 수 있지만, 왕은 다만 홍림과의 사랑을 꿈으로 꾸거나 그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배신한 홍림이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할 때에도, “이미 네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다른 이에게 줘 버렸는데, 목숨을 거두어서 무얼 하겠느냐?”라고 말하며 홍림을 죽일 수도 없는 사람이 바로 왕이다.



왕의 홍림에 대한 사랑은 10여 년 동안이다. 연인들의 담론은 시작도 끝도 없이 오직 중간만을 되풀이 한다고 바르트가 말하였지만, 그 중간이 물리적 시간으로 그리 길지 않은 것이 범인(凡人)들의 사랑인데, 왕의 사랑은, 그 욕망은 어떻게 그토록 멀리까지 지연되었을까? 그의 잉여쾌락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유일하게 저항하고 있는 영역이 바로 사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으로서’ 저항하고 있다는 한 사람의 외로운 사치. 그 미욱한 사치마저 상실될 때 그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홍림이 왕후가 죽은 줄 알고 목숨을 걸고 왕에게 대적하지만, 이미 목숨조차 무의미해진 왕은 더욱 절박하게, 더욱 절망적으로 홍림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다. 아니, 홍림의 칼을 하릴없이 받는 것이다.

 




그래서 왕후가 부르는 <가시리>는 낭만적이고 왕이 부르는 <쌍화점>은 차라리 슬픔이다. 영화의 제목이 고려가요 제목 그대로 “雙花店”이 아니라 “霜花店”인 이유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가시 돋힌 듯 강한 이미지이지만 순간의 볕에 금방 스러져 버리는 서리꽃[霜花]처럼, 왕은 그렇듯 강한 듯 보이지만 찰나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어쩌면 ‘傷禍’이다. 다시 말해, 상처가 부르는 재앙인 것인데, 그 상처는 바로 ‘왕이 될 수 없는 왕’, ‘연인이 될 수 없는 연인’이라는 역설적인 부조리가 함께 반응한 화학작용이다.

영화에서는 유독 클로즈업이 많다. 홍림의 얼굴은 아름답다. 왕의 얼굴은 늘 경련이 이는 듯 어색하고 그늘져 있다. 활극장면에서조차 롱샷보다 풀샷이 많은 것은 인물들의 아름다운 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샷에서도 왕의 몸은 처연하고 절박했다. 

  

 

= 한귀은 www.sophy.pe.kr =

 

 

 

 

 

 

 

 

장소만 스펙터클, 내용은 멜로드라마.

깊게 동화되지 못하는 까닭은...

감독의 말마따나 혹 배우들을 소모시키는 영화는 아닌지

 

눈으로 보는 충격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충만의 영화가 더 좋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취향

영화를 선택하는 배우의 취향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취향이

다를 뿐이지!

 

 

 

 

유하 감독 2008作

조인성,주진모,송지효

20090108서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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